글쓰기 힘들다 정말
넷플릭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래, 오늘도 정신줄 안 놓고 잘 버텼네, 수고했어, 자슥.' 이어지는 스스로의 쓰담쓰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거라서, 평일과 주말 구분하기가 어려운 방학 기간. 10인치 화면 속 크레딧은 유년 시절 자정 넘은 시간에 장엄하게 흐르는 E장조의 애국가와도 같다. 당일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TV에서 눈 떼고 (부모님한테 혼나기 전에) 이불속으로 들어가라는 신호.
요즘은 케이블 채널로 24시간 돌아가지만 '88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와 함께 하던 국민학생 시절에는 분명 시작과 끝이 있었다. 오후(저녁) 방송 시작 화면조정도 나왔다. 심지어 애국가가 나오기 전, 시청자에게 감사의 말씀과 함께 해당 방송국은 방송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정을 준수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뿐이랴, 배경화면에는 고려청자의 학을 모티브로 한 지극히 한국 전통의 미를 보여주었고, 시그널 음악으론 치마로사의 오보에 협주곡 1악장의 애조띤 멜로디가 나온 게 지금도 선명하다.
그래도 그렇지. 오늘도 영화만 보고 하루를 마친다고? 명색이 브런치 작가인데 뭐라도 하나는 쓰고 자야지. 그동안 온갖 그럴싸한 핑계와 변명으로 넘어간 것도 벌써 수개월이야. 경제적인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실제로 굶은 적도 없었잖아. 심정적으로 쪼들리는 것뿐이지. 큰소리 뻥뻥 쳐가면서 브런치 심사위원에게 포부 밝혀놓고 이럴 거야 정말?
고온 건조한 스페인의 여름 날씨에 이미 다 먼지 풀풀 나게 마르고 쩍쩍 갈라진 밭에서, 그래도 새벽이면 풀줄기에 붙은 이슬 마냥 위태롭게 매달린 작가적 양심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을 두드린다. '그래 쓰자, 써.' 하며 방금 전 시스템 종료를 눌러 끈 노트북을 다시 켠다. 맑은 정신을 위해 냉수도 한 잔 들이켠다. 하얀 스크린 앞에 껌뻑이는 커서를 마주한다. 자, 마음을 가다듬고, 응...?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음이 제법 크다. 노트북 시계는 이미 밤 11시를 넘었다. 이 마덕리(Madrid) 촌구석 알칼라(Alcala de Henares) 마을에 시시껄렁한 녀석들이 둘 셋 모여서 블루투스 스피커 갖고 나와 술 마시며 놀아 재끼는건가 싶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저쪽 구시가지에서 굉굉 거리는 소리가 난다. 기타에 드럼은 물론 보컬까지 다 갖춘 소리. 잠깐만 들어도 뭔가 익숙한 멜로디.
Waterloo, I was defeated, you won the war
Waterloo, Promise to love you forever more
Waterloo...
세상에! 아바의 '워털루'였다. 아니, 지금은 불금도 아니고, 내일 거룩한 주일을 맞이하기 전날인 토요일 밤에 온 동네를 이렇게 뒤흔들다니. 경찰을 불러야 되는거 아니야, 이거. 오늘도 글 쓰긴 다 틀렸네, 아놔... 하지만 멀리서도 또렷이 잘 들리는 아바 곡 메들리 때문에 이미 양 손가락은 더는 노트북 타이핑이 아닌 박자 맞추는 드럼 스틱이 되어 흥겹게 책상을 두들기고 있었다. 아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이미 늦었다. 쩝.
한국 다녀온 사이 놓친 게 있었나. 구글에 들어가 알칼라의 8월 행사로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부터가 시작이었다. 심지어 밤 11시에 시작하는 공연만 4개였다. 그리고 공연은 새벽 1시 정도까지 간다고 안내문이 나와 있다. 아니, 스페인 사람이라면 여름휴가 때 전부 지중해와 대서양 해안으로 가는 게 국룰 아니었니. 이게 웬일이야 대체.
장 볼 때와 쓰레기 버릴 때를 제외하곤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내고 있으니, 알칼라 대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파악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이곳 마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깜빡하고 있었다. 하긴 그간의 축제를 대충 기억나는 것만 생각해 봐도 4월 로마 시장 축제 mercado romano, 5월 동네 구 단위 축제 fiesta de distrito, 6월 Rock festival... 정말 노는 데 진심이다. 삶은 즐기라고 있는거지, 일해서 돈 벌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하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렇다. 내가 사는 곳은 그렇게나 미디어에서 쉬임 없이 띄우는 <축제와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었는데 5년 만에 한국에 한 달간 다녀오면서 깜빡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드리드 수도에서 살 때는 이렇게 주말마다 창문 너머로 밴드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주거지구와 상업지구가 섞여 있어서 그랬던 거였을까.
혹시나 해서 작년 여름휴가 기간도 검색해 보니, 있긴 있었다. 다만 길고 긴 코로나 후유증에 그것도 완전히 끝난게 아니었던 터라 올해 또는 이전처럼의 규모는 아니었을 뿐이다. 1년 전이라고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 이러니까 내가 글을 못 썼던 거지, 암은. 내가 쓸려는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눔의 놀고먹고 춤추는데 진심인 마을이 작가 생활을 못하게 한 거지, 암만. 틀림없구만.
창문을 다시 닫고, 아예 창 밖의 차단막까지 내렸건만, 새벽 1시가 넘은 지금까지도 스페인의 유서 깊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대학도시는 밤을 잊었다. 에라이, 잠자기도 틀린 마당에 글은 무슨 글. 나도 오늘은 아바 형님 누님의 추억의 명곡으로 흥부자가 되어 하얗게 태우련다.
(배경사진: 2022년 8월 알칼라 축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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