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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ug 25. 2022

물어보는데 거리낌 없는 스페인 사람들

이제는 저도 물어봅니다

스페인 온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다. 지금처럼 스페인어 통역으로 나갈 실력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일 하나만 덜렁 보고 나온 어리바리한 외국인. 누가 봐도 한국인 티가 나고, 그것도 스마트한 직장인도 아닌 완전 관광객 모드 풀풀 나는 촌뜨기.


그런데 누군가 깜빡이도 없이 불쑥 들이대며 말을 붙인다. 어떤 아주머니다.

-¿!("·%&=&&!"/Ç*^ª¨¡?

=Sorry, what?


그러자 다시 묻는다. 처음엔 너무 당황해서 뭔가 했는데 다시 들어보니 스페인어다.

우리로 치면 종로에서 인사동 가는 길을 묻는 듯한 느낌적 느낌. 

그래, 길 모르실 수도 있지. 그런데요, 아주머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저 보자마자 '아, 이 양반은 암 것도 모르겠구나.' 하는 느낌이 딱 들지 않던가요?

속에서 구시렁 대며 변명을 하는 사이 아주머니는 휙 지나갔다. 영어를 써도 스페인어만 들이밀던 아주머니의 우직함에 황당했던 기억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후 사무실에서 본격적으로 외노자의 삶을 시작하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우회보다는 직진, 비유보다는 직구를 선택하는 스페인 (일부) 사람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대표성을 갖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 인지하기도 전에 반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일이 잦아진다.


물어볼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스페인 사람들. 그저 말을 건다기보다, 자신이 얻어야 할 정보가 내게 있는 거라면, 그래서 나를 통해서만 일이 해결될 수 있는 경우라면, 눈치를 볼 것도, 신경을 쓸 것도 없다. 어렸을 때 수십 번을 탐독했던 책 <먼나라 이웃나라>에 유럽 개괄편을 읽고 상상했던 스페인 사람의 이미지와는 제법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질문 있으면 하세요.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발표가 끝나면 으레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입시학원 강사를 수년간 했지만 질문을 받아본 경험은 없었다. 나중에 학생들 자리로 하나씩 찾아가는 경우가 아닌 이상, 수십 개의 눈동자가 지켜보는 교실에서 자신있게 손을 들어 물어본다는 건, 우황청심환을 먹을 정도의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경향은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있다 하더라도 따로 조용히 찾아가서 전한다. 면전에서 한다는 건, 누군가 작심하고 총대를 메지 않는 한 미션 임파서블이다. 


스페인에서는 정말 검지를 올리건, 손바닥 전체를 올리건, 아니면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건, 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얘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왜? 질문 있으면 하랬잖아, 할 말 있으면 하라며?' 이런 인식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하지만, 하나 더 살펴봐야 할 게 있다. 


본인은 다르다는 걸 전하는 것일 뿐, 당신이 꼭 틀렸다 내가 맞았다는 시비를 가리고자 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자신의 의견은 '나'라는 인격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이 일과 관련된 나의 '의견'에 다른 소견이 있음을 오해가 없게 하고자 명료하게 전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흥분한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논리와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만 입증하는 게 된다. 한마디로 게임 끝. 


내가 경험한 스페인의 한국계 글로벌 기업에서 스페인 직원들의 질문, 발표, 피드백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감정적으로 올라갈 일은 더욱 아니다. '오, 그랬니?' vs '오, 그렇구나.' 이 두 가지로 회의의 내용 전달과 전개는 분명해지고 계속 이어갈 수 있다.


개인적인 부탁이 있을 때는 스몰 토크부터 시작해 살짝 돌리는 얘기를 하지만, 일과 관련해서는 어려울 것도, 유심히 고려할 것도 없다. 오히려 처음부터 다 오픈하고 본론부터 바로 들어오니 처리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소심했던 내 성향 때문일까. 그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로 들어오는데, 나는 기분, 상태, 배경 등 오만가지를 생각하느라 묻기도 전에 진이 빠지고, 기승전결의 시나리오를 쓰느라 갈팡질팡 했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기는 식의 태도가 바뀌어지기 까지 거진 십 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지금에 와서야 눈을 돌려보니, 물어본다는 건 그만큼 관심을 갖고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관심이 있다는 건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또는 상대의 일과 의견에 두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고,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다. 질문은 관심이라는 동전의 뒷면이다. 


어쩌면 질문 그 자체보다 손을 들어 올리는 행위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타인의 주목을 끄는 일이 되어서.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첫 시작이 어렵지, 한번 하고 나면 그 이후는 매끄럽게 타고 간다는 것을. 별 것도 아닌 거지만, 그 별 거 아닌 거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에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했는지 우리는 안다. 나중에 이불킥을 할지언정 그때 그 현장에서의 질문은 성취감을 안겨주는 마중물이었을 것이다.


택시를 타면 기사에게 날씨를 묻는다. 식당에 가면 직원에게 추천 메뉴를 묻는다. 고객을 만나면 컨디션이 어떤지 묻는다. 친구를 만나면 요즘 재미난 일이 뭔지 묻는다. 너를 만나면 자꾸 물어본다. 관심이 있으니까. 사랑하니까.


photo by kate kalvach,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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