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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ug 26. 2022

네가 화나면 화날만한 일인 거야

그래, 그렇구나

"참 착해."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듣는 말 중 하나는'너는 참 착해.'였다.

그러면 그 때나 지금이나 그 말에 대한 리액션 역시 변함없다: 배시시 웃거나, 우물쭈물 몸을 꼬거나, 아휴~ 하면서 어깨는 앞으로 움츠러들고 고개는 15도 아래로 기울어지는 것까지.


맨날 착한 천사로만 사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이든 오래 보고 지내온 사람이든, '착하다'라는 꼬리표를 붙여주는 걸 보면 어느 정도 타고난 성격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딱히 악한 사람도 없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대부분 착하고, 선하고, 사람 좋다. 심지어, 나와는 안 좋아도 그 역시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는 착하고, 선하다. 다 누군가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베프이고 동료이며 가족일 테니까.

 

문제는 자의든 타의든 착함을 유지하고 사는 게 강박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게 적정선을 넘어 지나치게 신경을 세우다 보니, 상대의 반응에 나를 맞추면서 나 자신은 사라지고 말았다. 긍정적일 때보다 부정적일 때 특히 심했는데,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전부 내 탓이고,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상대에게는 항상 용납할 만한 이유가 있다 여기며 모든 원인을 나에게로 끌어오는 버릇이 생겼다. 




오랜 세월을 축적한 버릇은 습관이 되었다. 타인이 칭찬에 감사히 받으며 인정하기보다는 운이 좋았거나 돕는 분들 덕이라는 식으로 무조건 돌리려 했다. 함께 한 팀의 협업과 덕을 본 건 사실이지만, 그들과 함께한 내게는 이상할 정도로 설 자리를 주지 않으려 했다. 나는 착하기만 할 뿐 유능하거나 그걸 감당할 만한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규정짓고 구겨 넣었다.


일이 잘 될 때는 나를 숨기고 반대로 안 되면 나를 드러내며 가학적일 정도로 정신적인 매질을 했다. 측은하다 못해 기이할 정도의 행동을 한 데에는 어쩌면 직장생활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상사의 분노는 폭언과 인신공격으로 하루의 일과처럼 나타났고 때로는 기물파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폭주하는 상사 앞에 가는 순간, 입 속 침은 한여름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이 되었다. 약물 부작용으로 혀가 뻣뻣해진 사람처럼 말 한마디 꺼내기가 힘겨웠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머리에 선을 연결하면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 당황하는 것처럼, 그 앞에서 머릿속 데이터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려 텅 빈 백색의 뇌피질만 남았다. 손은 금단현상을 겪는 사람처럼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 떠는 팔을 진정시키려고 잡으면, 그 팔마저 같이 떨었다.


병신, 뭐하냐, 가.


그 한마디에 전쟁 부상으로 다리 하나 잃은 패잔병처럼 몸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간다. 분명 그 전에는 유럽 법인 전체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의 나름의 성과를 이루고 인정을 받아 잘 나가던 best employee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저갱으로 떨어지듯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나보다 더 속이 상한 팀원은 강한 어조로 왜 그렇게 당하고 사느냐고 했다. 자기 같으면 들이받았을 거라고 했다. 천상 착해 빠지기만 한 무능력한 팀장은 담담하게 이렇게 응했다: 아냐, 다 내가 잘 못해서 그런 거지. 나만 잘했어봐. 이런 일 없었을 거야. 그나저나 미안해. 이런 꼴 보여서. 


그 친구에겐 사이다는커녕 고구마만 더 목에 들이민 형국이 되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리며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빌빌대고 무슨 일만 생기면 미안하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도 몰랐고, 희로애락의 감정도 빠져나갔다. 감정과 에너지가 가득했던 저수지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로 파스스 흩어졌다. 


인격체가 완전히 파괴된 그곳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특별해지고 싶지도 않다. 그저 무난하게 학창 시절 보내고, 직장 다니면서, 가정 꾸리고 사는 것, 이게 기본 틀이다. 개인적으로 더 바라는 건 있지만, 그건 일단 위 과정을 거치고 나서의 일이지,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 범부 그 자체로도 별다른 불만 없이 살 사람이라 스스로 믿고 있었다.


달리 보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 분별하는 판단, 사고의 틀과 같은 이성의 영역뿐 아니라, 그때 그때 느끼는 감정이 유달리 독특하거나 별날 게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나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 사고와 감정은 보편적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내가 갖는 감정, 특히 분노, 짜증, 회의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유별나게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내 감정을 표현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상담자의 고민에 깊이 공감하며 차분히 내면의 이야기를 들은 상담가는 괜찮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상담자는 참아왔던 눈물을 훔쳤다. 그 어떤 화려한 수사 어구가 아닌 그저 괜찮다는 말 하나에 십여 년의 말 못 할 고통이 녹아버리다니. 지켜보는 나 역시 눈사태를 겪듯 마음 곳곳에서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정신없이 눈물 콧물을 쏟았고, 후련하게 비운만큼 무언가 다시 채워짐을 느꼈다. 


그건 '건강한 나'라는 자아였다.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때마다 함께 해 준 사람들. 평범한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함께 해 준 분들.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분의 진심 어린 마음이 건강하게 다시 일어서도록 불어넣어준 훈풍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photo by youtube channel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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