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도, 안방에도, 아이들 방에도 책상, 책장, 이불이 축축해질까 봐 탕, 탕 소리를 내며 집안과 밖을 나눈다.
부엌은 예외다. 부엌은 비가 들이치지 않는 편이고, 설령 들어온다 해도 타일 바닥인지라 슥 한 번의 걸레질이면 말끔히 닦인다.
응? 아니, 그새 그쳤다고? 설마 이번에도?
그렇다. 스페인에선, 그것도 여기 마드리드에선 5분 넘기는 비를 보기란 쉽지 않다.
나 왔다고 얼굴 도장만 찍고 가는 얄미운 동료랄까. 진득하게 시간을 같이 보내주질 않는다.
오기가 무섭게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지고, 흙냄새만 남기고 가니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이다.
나보다도 비를 좋아하는 아내의 입장에서 스페인의 비는 반가운 선물인 동시에 야속한 존재다.
스페인의 면적이 우리나라의 5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보니 우리나라처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든지, 전국 대부분이 한여름 40도를 웃돈다든지 하는 일기예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북부 대서양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온난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를 띄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한여름에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다. 특히 무성한 나뭇잎 아래 그늘로 몸을 숨기면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해지거나, 예민한 사람의 경우엔 살짝 한기를 느낄 정도여서, 한국에선 오뉴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를 여기서는 일 년 내내 달고 살 수도 있다.
스페인의 기후-청: 대서양, 녹: 지중해, 연녹: 황무지, 황: 아열대, 적: 도시기후(열섬) (출처: 스페인 위키)
요즘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상해진 기후 때문에 스페인도 몸살을 겪고 있다. 사막화가 가속화된다는 뉴스, 산불로 피해규모가 상당하다는 소식, 폭염으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안타까운 일까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내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에 나왔으니, 언제 한번 마음 편히 지내볼 때가 있었겠느냐마는,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환경과, 이를 통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자극적인 제목으로 불안을 가중시키니, 나무뿌리가 마르기 전에 내 속부터 다 타들어갈 지경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다 타고 그을려서 한 줌 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스페인은 지하수 개발과 관리가 잘 이루어져 있어 농작물을 잘 키워내는 편이다. 아이들 아침 등굣길이면 공원의 스프링클러는 항상 힘차게 뿜어져 나와 아름드리나무를 적시고, 팡팡 밟고 뛰어놀아도 괜찮을 잔디의 마른 목을 흠뻑 축여준다. '저기요, 저희들 걱정할 거 없어요, 그저 당신만 잘하면 돼요.'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약속이나 한 듯 훑고 지나가는 바람 편에 안부를 전해온다.
오늘은 무려 세 번이나 비가 왔다. 새벽부터 치면 네 번이다. 새벽에 얼마나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끼 인스턴트 차림상으로 마련한 듯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지나갔다. 서울에선 올여름 한 시간에만 140mm가 넘는 비가 왔는데, 마드리드에선 한 달을 내리 기다려도 20mm가 안 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무려 세 번이나 찾아와 줬다는 게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그래, 엄지손톱 반달만큼만 이라도 뿌려주고 간다는 게 어디야, 세상에. 그렇게 비가 온몸으로 자신을 반짝이며 알리고 간 자리, 한결 더 시원해진 바람이 찾아온다.
스페인에서 비는 단 5분 만의 등장으로도 설렘과 기쁨을 가져온다. 굳이 우산 챙길 생각도 안 하고, 온다 해도 쓸 생각을 안 한다. 맞는다 해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마르고 마니까. 그래서, 가끔은 그 흔적이 남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심지어 물이 아닌 기름이었으면 좋겠다. 따로 손세탁을 거치지 않는 한 남아 있어서, 볼 때마다 너와의 기억이 살아나게 말이다.
왔으면 왔다고 말이라도 좀 전해주지, 살짝 얼굴만 비추고 가는 네가 얄밉다 하지만, 실은 그것도 다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그러니 그렇게 얼굴 도장만 찍고 갈 거면 차라리 오지 말라고 매몰차게 얘기하는 건, 기실 좀 더 머물러 있어 주면 안 되겠냐는 다 큰 어른의 서툰 투정이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에서 같은 음을 마디 하나의 차이로 장조에서 단조로 순간에 변화시키듯, 세찬 비바람에 마음이 휘몰아친다.
방금 업데이트된 일기 예보에 무려 12시간을 내리 비가 온다는 소식에 네 생각이 나 뜬 눈으로 지새우고픈 밤을 맞는다. 기상 이변에 따른 일인지, 아니면 순리대로 오는 건지, 십 년을 넘게 살아도 여전히 이방인의 경험으로선 알 길이 없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예보이지만, 그래도 내일은 5분 이상은 볼 거라는 기대감에 오랜만에 아내와 까페 데이트를 예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