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정답이 없거든요
ㅁ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
그러나 절대로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ㅁ 넘사벽 예술가의 공연을 관람하며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실은 나 또한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박수갈채를 받고 싶다.
ㅁ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며 '헐 대박! '하며 라이킷을 누른다.
하지만 '사실 쓰고 싶었던 얘기인데, 어흑, 이제 어떡하지' 하며 속상해한다.
ㅁ 영상 속 광고처럼 가족과 발랄하게 뛰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되고 싶다.
동시에 나만의 시간을 챙겨 글도 쓰고 강연도 하며 자아의 완성을 이루는 한 인간이고 싶다.
고백해야겠다. 나는 욕심 많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지 않고서는 이율배반과 모순에 가득 찬 내 모습을 설명할 길이 불가능하다.
워라밸을 말하는 세상이지만, 사실 워라밸은 개인의 노력만으론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되면 가능한 일일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눈치 문화가 사라지고, 당당한 개인주의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요원한 얘기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접근해 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불가능해 보인다. 직장인이었을 때는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직장인이라서. 프리랜서가 된 지금은 프리랜서라서 더더욱 그 누구보다 불투명한 불안한 미래를 두고, 현재의 내 삶을 담보 잡혀 살아야 하기에, 나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건, 야식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다이어트를 꿈꾸는 것처럼 요원하기만 한 일이다.
애당초 삶은 공평하지도 않고, 내가 악착같이 아등바등 대며 고군분투하는 사회인으로의 삶 또한 다르지 않다. 언제나 현실은 불평등해 보이며, 있는 자들만의 판인 것처럼 보이며, 나는 찌질한 소시민으로서의 시간을 꾸역꾸역 채워갈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서 내가 꿈꾸는 이상과 당장 코앞에 닥쳐있는 현실의 괴리는 두말해 무엇하랴.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제일 어렵고, 코앞에 마주한 현 상황이 위기 그 자체이며, 눈 뜨기가 무서울 정도로 호러 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공간이 겨우 제 한 몸 운신할 사무실의 파티션 공간이다.
우리나라만 그러할까. 외국에 나와도 별 다를 바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여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이 덜하다는 점이 위로 아닌 위로가 된다 :
오매, 저분은 알고 보니 나보다 더 오랫동안 백수였구나. 아이고 세상에, 저 친구는 남편 실직에, 본인도 정리 해고된 지 수개월째. 심지어, 저 집은 애도 있는데 어째 저러고 산 데 쯧쯧쯧... 오지랖도 유분수지. 너나 잘하세요 할 소리가 귓방맹이를 두드릴 일이 차고 넘칠 일이다. 집에서 슈퍼마켓 가는 사이에 벌써 넝마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오만 사연이 모여든다. 전부 써내면 브런치 사연 공모 입상은 따놓은 셈이랄까.
하지만, 그들의 삶이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은 무시할 수 없는 대상임은 자명하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무시 못 할 진리이다. 오히려 어설프게 물질이 있는 곳에 이기심과 계산이 한 번 끼어들기 시작하면 도끼눈을 뜨고 저마다의 실리를 계산하며 가정이 쪼개지기 일쑤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렇다고 내가 행복지수 1위의 부탄이며 방글라데시에 가서 살 것도 아니니, 적절하고도 꾸준한 수입은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감에 돈맥경화를 방지할 최고의 가치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추구할 방향은 무엇인가.
수학, 과학처럼 명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압축적으로 인생의 바닥도 경험하고, 나름의 날개도 달아봤던 세 아이의 아빠로서 자녀들을 모아놓고 담담하게 풀어놓듯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순간순간은 충실하게, 하지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님처럼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누가 살면서 코로나 때문에 2년 넘게 고생할 줄 알았는가. 다들 다음 달이면, 아니, 다다음달이면, 아니 내년이면 분명 좋아질 거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결과는? 이제 겨우 한 발짝 내딛고는 있지만, 여전히 불투명하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도 더 전인 갑골문자의 은나라도 미래를 점치기 위해 거북이 배딱지를 이용해 희끄무레하게나마 내다보았다지만, 21세기 AI 가 주름잡는 시대에는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겠는가. 빅데이터를 본다 해도 변수는 여전하다.
서유럽 변방 마덕리 촌에 칩거하며 세 아이 외에는 아무런 것 없는 불혹의 아재로서 할 수 있는 얘기는 이상이든 현실이든 변할 수 있음을 인정했으면 하는 바이다.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면 그만큼 본인만 피곤해진다. 타인을 두고 판단하거나 자신을 향해 자책하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경우가 없다. 유연함을 잃고 경직되어 굳은 표정으로 상대를 제 멋대로 올리고 낮출 뿐이다.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자신만 모를 뿐이다.
하여 다양성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를 삼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그것으로 절대화하여 스스로를 우물에 빠뜨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와 같을 수도 또는 비슷할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낳은 자식이어도 나와 판이하게 다른 마당에 어떻게 상대를 나와 같은 기준으로 끌어내리려 하는가. 하나의 또는 몇 가지의 기준만으로 쉽게 재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단순한 흑과 백의 무채색이 아니다. 우리는 빨주노초파남보이자 그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을 가진 무지개이며, 얼마든지 극과 극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이미 굳어버린 화석이 아닌 오늘도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cover photo by jason leung,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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