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으로 글 몇 줄 적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지만, 내면에서는 항상 감정의 마그마가 드글드글 끓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어렸을 적 피아노를 오랜 기간 배우고 익힌 게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잘 친다 못 친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충만으로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을 말함이다. 피아의 구별이 없어지고, 잘하고 못함이 무의미해지는 그때에, 누가 뭐래도 나는 자칭 아티스트가 된다. 다만, 본의 아니게 이기적인 예술가가 되기에 그 모든 소음과 실수를 감당해 왔고, 앞으로도 감당할 가족과 이웃에게는 너무도 미안한 일이다. (그래서 별도의 공간이 필히 필요하...)
묵직하고도 어두운 낮은 음역대를 왼손이 낙인찍듯 강하게 귓가를 때린다. 페달까지 밟으면 시뻘건 마그마는 쿨럭거리며 웅장하게 터져 나온다. 반면, 오른손은 잠시도 쉬질 못하고 백건과 흑건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꿀벌이 되어 꽃을 찾아 날아다닌다.
한번 터진 마그마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식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꿀벌은 제대로 꽃가루를 가져와야만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열심히 일하고도 삽질했느니 헛수고라는 식의 핀잔만 듣는다. 어디에 향기로운 꽃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 집과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등의 오만가지 계산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이성과 감성은 저마다의 영역에서 머릿속을 휘젓고, 손가락은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자 하나 번번이 헛다리를 짚는다. 그때마다 도리도리 치게 만드는 건 죄 없는 두 귀의 몫이다. 눈동자는 흑백만이 남은 건반과 악보를 위아래로 계속 쳐다보다 어느새 마네키네코 (복을 부르는 고양이)의 손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괴감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다행히 이런 삽질도 하다 보면 나름의 흔적을 남긴다.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길을 찾고 손에 익으면 그때부터는 가족과 이웃에게 조금은 덜 미안한 소음이 된다.
피아노가 가져오는 격렬한 감정은 가벼운 감정 자체로만 끝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피아니시모의 여림이라 해도 그 안에는 분명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이 명료한 타건 속에 깃들어 있는 한, 연주자는 어떻게든 조화를 이룰 과정을 찾는다. 감정의 부단한 노력은 곧 이성을 일깨워 시간을 무미건조하게 흘러가게 놔두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다. 하여, 음악은 연주자와 청자 모두를 시간에서 공간으로, 소리에서 VR (virtual reality)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이처럼 음악은 듣는 것으로 시작해 보는 것으로 마치게 한다.
요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때가 많아졌다. 가을을 타고 이제 곧 다가올, 어쩌면 이미 시작했을 겨울을 나기 위해 그런가 싶다. 남이 쓴 책을 읽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졸작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담아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낼 때 느끼는 감동은 보다 오래가고 크다. 졸작이라 해도 그건 나를 모르는 남들의 지나가는 말이다. (물론 때로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있다. 그때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쇼팽의 녹턴이 생각나는 밤이다. 베토벤의 월광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시간이다. 피아노가 이끄는 삶, 나의 시간과 나의 공간을 가져보는 고요한 나만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