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발견한 인생 해답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스페인에 오기 전 슬로바키아는 10월 말부터 스노우 타이어 교체가 의무일만큼 눈이 많이 오는 나라이다. 슬로바키아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들도 겨울의 눈과 폭설을 대비해 예외 없이 스노우 타이어 교체를 의무로 지정하고 있으며 따르지 않는 경우 적발되면 벌금을 내야만 한다.


10월 말에 내리기 시작하는 눈은 3월까지 보통 5개월간 원 없이 눈 구경을 한다. 한국에선 도구를 이용해서 귀여운 눈사람도 깜찍한 눈오리도 만들어 사진을 찍어 올리지만, 이 동네에선 내 키만 한 눈사람도 5분이면 뚝딱이다. 그냥 굴리다 보면 어느새 완성이거든. 아침에 나가보면 밤새 내린 눈이 발코니 틀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동토의 땅이란 이미지가 딱 맞을 정도로 슬로바키아의 겨울은 제대로 추웠다. 우리나라만 사계절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곳도 우리 못지않게 나름 뚜렷했다. 차이가 있다면 가을에 울긋불긋 단풍 대신 누리끼리한 낙엽을 보며 지내야 한다는 정도.


그런 곳에서 6년을 보내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으로 왔다. 달콤한 오렌지 꽃향기가 일품이라지? 거리마다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아리아가 흐르고, 투우사를 향해 꽃다발을 던지는 여인이 있으며, 플라멩코의 정열 속에 인생을 새로이 쓴다지 않았어? 한낮의 태양만큼이나 밤도 다른 유럽과는 다르게 그렇게 생기가 돈다며?


대단한 착각, 완벽한 오산이었다. 그래, 뜨거운 태양은 분명 있었다. 스페인에 가면 선글라스만 쓰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큰맘 먹고 큰돈 들여 라식인지 라섹인지 하는 수술까지 해 가며 낭만 가득한 삶을 꿈꿔왔지. 국민학생 때부터 알아오다 고등학생 때는 음악 가창 시험으로까지 부른 이태리 가곡 오, 나의 태양 O Sole Mio을 상상하며...


파바로티의 태양은 찬란하게 빛났건만 스티브의 태양은 재앙이었다. 제목을 바꿔야 했다. 이글이글 작열하다 못해 오지게 불타는 태양은 *니꺼, 얘꺼, 쟤꺼지, 내껀 절대 아니라고 말이다. 화제를 바꿔 디즈니의 오래된 화제작, 라이온 킹 1을 잠시 본다면, 아빠사자 무파사가 아들 심바에게 프라이드의 평원을 보여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네 것이라고 했다. 클래스가 다른 아빠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원래 '거'가 올바른 표기이나 격하게 표현하려 틀리게 썼습니다)


라이온 킹 3편에서는 사자 대신 미어캣이, 아빠 말고 엄마가 나온다. 언제 천적이 올지 몰라 24시간 앞발 모으고 귀를 쫑긋 세우는 미어캣, 티몬과 티몬의 엄Ma는 입장이 너무도 달랐다. 티몬의 엄마는 왕따를 당해 낙심한 아들을 격려차 어디론가 데려간다. 도대체 어디길래 그러나 하며 따라가다 마침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 아니 대체 언제 이런 멋진 곳이 다 있었던가! 하며 그 광활함에 티몬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동시에 엄마는 아주 담담하게 읊조린다 :

Everything the light touches... belongs to someone else.
빛이 닿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것이지.


저건 전부... 남의 거란다 (현실직시=동심파괴)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 사무실에서 노트북과 모니터를 마주하며, 눈물이 마르고 닳도록 엑셀과 피피티 자료만 파던 나로서는 외국이라는 게 아무 의미도, 감흥도 없었다. 여유, 휴가, 행복, 가족... 전부 남의 이야기였다. 남들은 한 달만 지내도 피부가 가무잡잡해진다는데 일 년이 지나도 허멀건 탓에 쟤 정말 스페인에 사는 거 맞아? 하는 소릴 들을 정도였다.


헛헛함과 허무함, 공허와 상실에 모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아예 혼자 조용히 삶을 정리해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서슴지 않고 했다. 직장 내 언어폭력을 견딜 재간이 없었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상사 앞에서 말을 더듬고, 머리가 하얘지고, 수전증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떨렸다. 인간 댕댕이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사람을 보면 피했다. 태양의 나라에서 극한의 한기를 심중에 느끼며 우울증과 트라우마의 늪에서 현실 지옥을 매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았다, 아니 버티고 견뎠다. 교회에서만이라도 위로를 받기 원했지만, 돌아오는 건 인과응보,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냐라는 식이었다.


<미생>에선 직장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고 했다. 아니다.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곳은 어디서건 지옥이다. 종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천하 보다도 귀한 한 영혼으로 볼 것인지, 빈자리나 채우고, 헌금이나 받아 본인 배나 불려줄 화수분으로 삼고, 시설 운영과 예배 진행을 위해 교회판 열정페이인 헌신페이를 집요하게 강요하고 세뇌하는 행위가 천국에서 볼 일은 분명 아닐 것이다.




집에 가면 미안함에, 직장에 가면 시달림에 어디 한 곳에도 마음을 쉬이 누일 곳이 없었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내 얘기가 될 줄은 몰랐다. 외모가 비루하다면 그냥 털고 일어나면 되는데 멘털이 털리니까 어디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들이 직장 상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마감하고만 기사들. 십여 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기분이라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럴 땐 그냥 나와도 되는 건데.


여기서 못 견디면 다른 데서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런 소리가 안에서든 밖에서든 들려온다면, 그냥 무시하시라. 내가 당신 없는 다른 데 가서 더 잘할 건데 무슨 걱정이냐고. 당신이 뭐라고 내 인생에 선 넘는 간섭을 하느냐고. 어려서, 경험이 부족해서, 지혜가 모자란 당시의 나는 이런 소리 한 번 후련하게 못한 채 그곳을 나왔다.


내가 스페인 사람이라면 이걸 굳이 아등바등 거리며 달라붙지 않을 텐데. 낙천적이면서 유연한 사고로 어깨 한 번 으쓱하며 puede ser~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야 미련하리만치 미련으로 남지만 그래도 깨달은 게 어디냐며 느지막이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회사를 나오고. 다른 일을 찾고. 잘 안 맞아서 또 다른 일을 찾아보고. 일은 맞지만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서 또 다른 일을 찾았다. 그 일은 천직이 되었다. 그 힘든 코로나 시국에도 천직 덕분에 잘 버텼다. 인생이 즐거워졌으니까. 인생의 재미는 돈에 있는 게 아니라 가치에 있다는 것을. 그러다 알았다. 삶의 모퉁이 어디선가 우연히 발견하는 불씨,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생에는 길이 정해진 하나만 있는 줄 알았다. 정답을 정해놓은 사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전국에 있는 학생을 일렬로 세웠을 때, 나는 몇 번째에 있을 것인가!

요즘이라면 당장 뉴스에 나올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저 말이 통했다.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그나마 현대 사회에선 더는 통용될 일이 아니기에 나 같은 자가 살아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줄로 달리면 등수가 정해지지만, 원형에서 출발하면 각자 가는 곳이 길이 된다. 기준이 하나라면 서열이 매겨지고 낙오자가 나오지만, 여러 개라면 각각이 독보적인 삶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대단하다 여기고, 경쟁상대는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라는 걸 알 것이다.


어제 보다 조금 더 나은 나, 그렇게 인생은 정답이 아닌 해답이 있는 곳이다. 정해진 게 아니라 풀어가는 것이다. 잘 풀리면 감사하며 주위를 돌아보면 되고, 안 풀리면 홀로 고민도 하고, 주위에 자문을 구해봐도 된다. 여러 조언을 종합해 결단을 내리는 시점에선, 어떤 과정과 결과로 연결되건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일단 받아들이면 된다.


현재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다면 그대로 하시라.

괜찮다. 아무 문제없다.


허나 안 맞는다면 잘 준비해서 나와 보시라.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준비해서 나와도 안 되면 또 해 보시라.

괜찮다. 아무 문제없다.


저 변방 스페인에 사는 제가 그러하듯 당신의 인생도

괜찮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이 달에는 순차적으로 앞선 작가님이 지정한 문장을 포함하여 글을 이어가는 글쓰기 릴레이를 진행 중입니다. 제가 지정한 문장은 <괜찮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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