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아름다운 마을에
무미건조하고 때론 절망적인 것 같은 일상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적이 있나요?
우연히 작은 불씨 하나가 떨어진 것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삶에 의미를 주는 불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980년대 멀고 아름다운 동네라는 이름의 遠美洞을 배경으로 한 양귀자 씨의 연작소설 <원미동사람들>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은 굳이 그 시대 그 공간 아니어도 지금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면면들을 드러낸다. 굳이 특정 지역에 국한하기보다 이름이 암시하듯 주무대에서 멀어진, 고단한 그러나 아름다운 사람들 모두에 대한 상징으로 여기면 좋을 듯하다.
소개되는 11개의 에피소드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삶이 녹록지 않다. 그중 「불씨」에 등장하는 진만이 아버지는 부천에서 서울로 출근하던 샐러리맨이었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던 세일즈맨이 된다. 그야말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 속에 고단한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명색은 전통문화연구원이지만 실제로는 전통문화를 표방한 모조품을 파는 세일즈의 교육을 받게 된다. 드디어 입을 열고 회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을 계몽하러 나서야 하는 날들의 고뇌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상금이랍시고 몇 푼 가지고 있던 걸로 항아리를 산 거예요. 이젠 정말 빈털터리라구요. 오늘은 가불이라도 좀 해다주셔야 해요. 외상도 더 이상은 안 된다구요.” 집을 나서는 그의 뒤를 쫓아오며 아내가 울상을 지었다..... 가불이라니, 어제에 이은 또 하나의 허둥거리는 하루가, 시작도 하기 전인 지금부터 그의 눈앞에 펼쳐져왔다.
원미동사람들 「불씨」p. 46
천방지축 슈퍼맨놀이만 좋아하는 어린 아들이 옆집의 항아리를 깨뜨리고 그것을 뒤처리 하는 과정에서 비상금으로 사둔 항아리로 변상을 하는 생활고에 찌든 아내. 그 아내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남편의 처진 두 어깨가 아침부터 너무 무겁다. 판매는커녕 입도 떼지 못하고 모든 시도에서 다 거절당한 채 허둥거리는 하루가 그렇게 끝나가나 했다.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에 앉아 있는 그의 옆자리에 한 사람이 앉으며 담배 피울 불을 빌려달라고 말을 건다. 결국 그가 그동안 오래 연습하고 갈고닦은 내용을 뱉어낼 수 있는 최초의 일인이 되었고 더욱 놀랍게도 최초의 구매자가 된다. 그저 담뱃불을 빌리던 그는 터미널에서 일하는 짐꾼이었지만 한때 지방 유지였다고 한다. 담뱃불을 빌리며 시작된 이야기로 진만아버지의 입이 열렸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짐꾼 권 씨는 며칠 후 있을 제사 때 사용할 용도로 촛대하나 사겠다며 구매의사를 보인다. 그렇게 권 씨는 서울로 올라오게 된 넋두리를 하고 진만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 에피소드는 끝이 난다.
"지루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
그가 담배 한 대를 사내에게 권했다. 사내가 손을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어이구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입만 아프게 해드리고 그냥 일어서려니까 내가 되려 미안스런 판에... 그럼 많이 파시구려."
사내가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실습은 끝난 것이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멍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텔레비전의 무협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개찰구 주변의 혼잡도 여전했다. 뭔가 미진한 느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의 옆자리에 다시 누군가가 앉았다. 돌아보니 아까의 그 짐꾼이었다.
"가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찜찜해서. 그 촉대라든가 촛대라는 거 그거 하나 사겠소. 제상에 촛불 켤 때 쓰면 딱 좋겠던데, 비싼 것을 못 사주더라도 그게 제일 값도 헐하니까 내 형편에 만만하고, 내가 이래 살아고 권씨 문중의 종손이라 제사가 사흘거리로 돌아오는 몸이라오."
원미동사람들 「불씨」p. 66-67
「불씨」는 제대로 담배를 피우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꽂아 놓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하루가 저무는 시간 짐꾼 권 씨에게 담뱃불을 빌려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우연히 이어지는 대화로 드디어 세일즈맨으로서의 첫 과업을 완수하게 된다. 권 씨와의 만남으로 어쩌면 만신창이가 되었을 진만아버지의 마음에 작은 불씨가 피워지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시작된 허둥대는 아침이었지만 저무는 저녁에 발견한 불씨로 인해 빵 부스러기처럼 바삭대며 흩어지는 비루한 일상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다음날도 허둥대며 또 다른 절망감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의 불씨가 내일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척박한 삶이지만 삶의 모퉁이 어디선가 우연히 발견하는 불씨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이 달에는 순차적으로 앞선 작가님이 지정한 문장을 포함하여 글을 이어가는 글쓰기 릴레이를 진행중입니다. 제가 지정한 문장은 <삶의 모퉁이 어디선가 우연히 발견하는 불씨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