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가 된 손님이 행사 마지막 날 내게 남겨 준 말 :
스티브, 살아보니 말이야, 누구는 천 원을 백 원같이 쓰고, 누구는 백 원으로 천 원같이 쓰는 사람이 있어.
자기만을 위해서 쓰는 건 쓰고 없어지는 거니까 천 원을 백 원같이 쓰는 거야.
하지만 남한테 쓰면 그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니까 백 원을 천 원같이 쓰는 거야.
백 원을 천 원같이 써야 돼, 알겠지?
굉장히 단순한 말이지만, 그 말이 유달리 가슴에 와닿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형님의 모습을 지켜보니 그는 입만 살아서 나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일관성 있게, 꾸준히, 몸으로 보여주었다.
둘러보니 내 주위에는 백 원을 천 원같이 쓰는 분들이 많다. 코로나 기간에는 백만 원으로 천만 원같이 쓰는 분도 있었다. 남에게 선행을 베풀어서 본인에게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쓰는 돈의 가치 자체에 집중한 것이다.
문득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형님, 제 주위에는 형님처럼 평소에 잘 베풀었는데도, 막상 본인이 어려워지니까 다들 나 몰라라 해서 상처받은 분들도 꽤 있었어요. 형님은 그런 경험 없었어요?
형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나? 나는 오히려 나갔다 오면 돈봉투가 주머니 여기저기에 꽂혀 있었어. IMF 때 쫄딱 망했는데, 그때 남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 난 평소에 누가 뭐 필요하다면 두말 않고 사줬거든. 사실 돌려받은 걸로 치면 난 내가 쓴 것의 반의 반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상관없어. 난 그저 도와주고 싶은 거야. 내가 쓰는 돈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거야.
이 형님이 남에게 베푼 거는 밥 한 끼 근사하게 사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후원한 구엘 정도 된다고 봐야 할까? 정확한 액수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형님은 내가 상상하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님이 말한 백 원을 천 원같이 사용하라, 나 자신보다 남을 위해 써라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거나 막연한 부러움의 대상으로 들리지 않았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간 다리가 찢어진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무조건 퍼주는 건 아직 내 수준에서는 할 바가 못 된다. 내 그릇에 맞는 걸 찾는 게 우선일 것이다.
중국 식당에 갔다. 웍 wok 요리로 비지땀을 흘리는 두 주방장을 보았다. 순간 수년 전 아내가 한 여름에 고생한다며 시원한 콜라 한 캔 씩 요리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 게 떠올랐다. 나도 종업원에게 부탁해서 콜라 두 캔을 전해 달라고 했다. 종업원들끼리 중국어로 얘기하더니 한껏 미소를 띠며 웃는다. 콜라를 전해주면서 식당 주인에게도 전한다.
종업원이 전해 준 콜라를 보고 요리사가 깜짝 놀란다. 비지땀은 여전하지만 표정이 급방긋이다. 그가 올려주는 엄지 척에 놀이동산에서 손님맞이하는 진행요원의 반짝이는 인사로 화답해 주었다. 팀라이트의 글루틴으로 주중에 글 하나씩 쓰듯, 백 원을 천 원같이 쓰는 일일일선一日一善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내일은 또 일상에서 어떤 뻥튀기 선행 하나를 튀어 올려볼까. 꾸준함 속에 그릇을 점점 넓혀야겠다.
제목 사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