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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12. 2023

모든 건 그때 그때 달라요

일명 케바케

종교적으로는 신의 섭리라고 한다.

또는 그분의 계획하심이었다고 한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게 인생이다.


그렇지만 이건 세상 떠나기 직전 회고할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혹은 현재의 안 좋은 상황을 어떻게든 좋게 해석해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게 수용할 수 있을 거라서.

절대자가 개입할 여지를 두어야 내가 책임을 조금이라도 면하고 자유로울 수 있어 몸부림치는 건 아닐까.


사대빵. 축구 스코어가 아니다.

Ça dépend. 그때 그때 다르다는 프랑스어다.

신의 섭리니 계획이니 하는 거창한 문구보다

궁색하긴 해도 차라리 현실적으로 내게 와닿는 말이다.




성경에 욥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말도 안 되는 일로 가정은 완전히 박살 나고 본인도 만신창이가 된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그의 삶을 멋대로 속단하고 정죄하고 잔소리를 한다.

인생이 잘 풀리는 것만 같아 한창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나의 모습이다.


장황한 궤변으로 가득 찬 친구들과 욥의 동문서답 논쟁은 어떻게 끝날까.

이야기의 시작처럼 다시 갑작스 신 개입으로 욥은 이전보다 더 잘 된 것으로 갈무리를 한다. (그게 정말 잘 된 일인지는 논외로 하자)


욥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인생은 본인의 선택과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인다.

절대선과 절대악 사이의 체스판에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병졸말 같다.

큰 그림을 볼 수 없어 프로그래밍된 대로만 열심히 살다 가고 마는 무수한 개미 중 하나다.


현대에 욥과 같은 사례를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없지는 않겠지만 주위에서 쉽게 볼 상황은 아니다.

더는 신의 개입으로 인간의 삶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본인의 선택과 감당으로 사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다 나와 너, 우리는 코로나를 만났다.

나와 너,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엉뚱한 일로 모두의 삶이 멈춰버린 암흑의 시간.

머나먼 조상은 경험했을지 몰라도, 나와 너는 살아생전 처음 겪어본 공포의 시간.


정확한 시작도 알 수 없듯 끝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이게 나만의 일이 아니라서, 불안에 떠는 내 손을 잡아줄 누군가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연대를 하려는 사람의 손에서 나는 살 길을 얻었다.


헌데...


예전에 폭언을 일삼는 회사 상사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을 때, 자기는 그러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다.

아픈 내 자식을 두고, 본인 자식도 아팠지만 기도해서 나았으니 너의 믿음을 돌아보라 정죄감을 안겨준다.

연봉은 높으나 상사의 폭언으로 매일 지옥 보내는 내, 신이 책임질 가난한 삶을 왜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느냐며 시비를 건다.


회사는 내 선택지만, 상사는 내 선택이 아니다.

치료부모의 선택이지만, 감당하는 건 아이의 몸이다.

가난을 택한 건 나인데, 결과는 온 가족이 다 져야 한다.


선택과 담당, 판단과 책임의 당사자는 모두 일치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상당하다.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선택으로 만들어 가는 나이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누군가가 선택한 것에 따라 모든 걸 감수해서라도 맞춰가며 변형하는 나일수도 있다.


모든 건 그때 그때 다르다.

나도 그때 그때 다르다.

사대빵. 사대뻥.

(불어는 특유의 불분명한 발음이 매력이다)


오늘의 스코어는 4점일 수도 빵점일 수도 있다.

아님 그 사이 어중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마음 잡고 뻥뻥 차며 나가면 된다.

나는 하루살이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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