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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Sep 26. 2023

사마귀

어느 날인지 기억은 안 난다. 오른손 엄지가 부어올라 있었다. 

별 거 아니겠지 했던 조그마한 상처는 곪은 것처럼 자리를 잡더니 사마귀가 되었다.

손가락에 난 사마귀는 병원 가서 냉각시키고 나면 떨어져 나갈 테니까 (둘째가 그랬다) 별일 아니겠지 했다.

의사에게 보여줬더니 의사도 별 거 아니라는 식이었다.

해당 부위를 차갑게 얼리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엔가 똑! 하고 시원하게 떨어져 나갔다.

막내딸을 데리고 등교할 때면, 녀석은 사마귀가 있는 손을 좋아했다.

어렸을 적 엄마 젖꼭지를 만지는 느낌이라며 둘째 오빠와 같이 갈 때면 자기는 항상 아빠 오른손을 잡고 가야 된다고 할 정도였다.

나름 정을 주던 사마귀가 떨어지고 나니까 막내는 아쉬워했다.


헌데 다시 어느샌가 같은 자리에 또 돋아났다. 막내는 좋아했다.

나로서는 귀찮고 보기 흉한 게 또 자리를 잡았으니 좋을 리 만무했다.

예약 날짜를 잡고 의사에게 가서 보여주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무심하게 치료를 받았고 돌아왔다.


이후로 사마귀는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몇 달을 지나 재방문을 하니 의사는 적잖이 놀랐다.

아마 본인의 경험상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결국 예전에 한 방법 그대로 하는 수밖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냉각기를 엄지 사마귀에 집중 살포했다.


그러다 휴가를 맞아 한국에 갔다. 가자마자 들린 피부과에서는 쓱 보더니, 한국에선 사마귀를 더 이상 냉각 또는 레이저로 치료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마귀 옆에 붙어 있는 피부가 아프다는 게 이유였다. 하긴 그전에 냉각 치료를 받을 때 제법 따끔거리다 싶을 정도로 아프긴 했다. 그래서 지금은 사마귀 제거제 액을 바른다고 했다.


바르는 약과 먹는 약 두 가지로 처방을 받았다. 진찰비용에 약값이 더해지니 몇 만 원 정도가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평소에 내는 의료보험비가 있어 무료로만 다녔기 때문에 돈을 써 보기가 오랜만이었다. 약을 보니 아주 어렸을 때 바르던 티눈약이 떠올랐다. 발바닥에 난 티눈을 겨우 제거했나 싶었는데, 어느샌가 녀석은 손바닥에서 한창을 기생하다 마침내 피를 콸콸 쏟아내며 뽑혀나갔던, 해서 시원하기도 했지만 조금은 비위가 상할 법한 그때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이젠 어른이니까 그때처럼 엄마가 발라 줄 일이 아니었다. 뭐든 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아픈 거고 피곤이고 잊은 채 열심이 특심이다 싶게 집요함을 발휘하는 나란 사람이니까, 시도 때도 없이 발라댔다. 


하루에 세 번 정도만 바르면 된다는 걸 열 번 조금 안 되게 발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를 때 확실히 따끔거림이 제법 컸지만, 괜찮다. 고문받는 것도 아니고 나으려고 하는 건데 이 정도쯤이야. 출장 온 화타의 뼈를 깎아내는 치료를 받는 장기 두던 관우로 빙의해 열심히 약을 바르고 덧바르며 참아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이제는 가이드로 말빨 좀 세우더니 과장과 허세의 달인이 다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우와 화타, 출처: 네이버 블로그 검사의 삼국지. 

 

약을 바르면 굳었다가 비늘 벗겨지듯 뱀 허물 벗듯 떨어져 나가는 걸 보며 곧 낫겠다 싶었다.

보름 지나 피부과를 다시 가보니 생각보다 빨리 치료가 진행 중이라며 의사는 좋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열심을 낸 보람이 있군 하며 계속 발랐다.


낫는 건 좋았지만 여전히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에 곰팡이라도 핀 것처럼, 우리 집 앵무새가 방금 싼 똥처럼 허연 딱지가 앉아있는 게 지하철을 타고 가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면 눈치가 보였다. 주위에선 얘기도 있었다. 의사는 치료 중에 덮지 말라고 했지만, 고민 끝에 반창고를 붙였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반창고 하나인데 뭐 어때하면서.


하루에 열 번 가까이 바르던 열심은 반창고가 있으니 두세 번 정도로 줄었다. 반창고를 붙일 때는 몰랐으나 떼낼 때는 반창고가 두르던 부위 전체가 짓물러져 있었다. 사마귀가 난 손가락은 진물이 나 터지고 굳기를 반복하면서 여기에 오가는 중에 손을 씻으며 물기까지 더해지니 내 신체 부위이지만 잘라 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일이 주어졌고, 손님들이 주목할 가이드의 손인지라 반창고를 매일 갈아주며 약을 바르고 상태를 지켜보았다.


지금은 엉망진창 그 자체다. 사마귀가 뭐라고 내 손가락을 이렇게 다 만들어 놓았나. 억울함 마저 들 정도였다. 어린 아들은 한 번만 다녀오고도 하루 이틀 내에 똑! 떨어지고 깔끔하게 사는데, 아재가 된 아빠는 반년이 넘게 코딱지만 한 사마귀 하나로 지금까지 고생이라니 세상 불공평하다 느껴진다.


손가락 하나 아파보니 세상에는 그냥 이루어진 게 없었다. 


엄지 하나 아팠을 뿐인데 글씨 쓸 때 엄지의 소근육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엄지 하나 부었을 뿐인데 별 것 아닌 거 하나 치료하기 위한 과정을 생각해 보니 정말 많은 이의 손을 거쳐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낫고 악화되는 걸 반복하면서 짧은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했으니 앞으론 이런 말도 안 쓰일 것 같다) 속 up & down 하는 걸 본다. 나았다고 완전히 나은 게 아니었던 것처럼, 악화돼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낫겠지. 사마귀는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생겨났던 것처럼. 잘 자고, 잘 먹고, 잘 운동하면 다 좋아질 일이다.



제목 사진: 포르투갈 해안 마을 나자레의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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