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Feb 09. 2021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혼, 플라멩코

주체못할 흥과 가슴시린 한을 만나보자

밤 9시 30분. 투다라라락 빡빡. 따르르르륵 딱딱. 구두의 앞코와 뒷굽으로 바닥을 쪼개 버릴 기세로 치는 저 소리. 공연이 끝난게 아니라 이제 시작한다. 안달루시아의 밤은 길다. 긴긴 밤, 안달루시아의 혼이 서린 플라멩코를 본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다.


플라멩코는 우리의 판소리처럼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된 스페인 고유의 예술공연이다. 우리만 알던 판소리가 유네스코에서 인정받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은 교민으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이다. 국악, 판소리 등 우리의 전통음악을 접할 때면 자주 듣는 두 단어. '혼'과 '한', 이것은 독특하게도 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 스페인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플라멩코는 그 안에서 풀어낼 가짓수가 좀 더 많다.




일단 외형을 대조해 보자.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 단 두 사람의 무대로 소리꾼 위주로 이야기를 엮어낸다. 소리 또는 노래인 '창'과 말로 전하는 '아니리', 여기에 몸짓인 '너름새'(또는 발림), 그리고 고수와 관객이 힘을 실어주는 추임새, 이 네 가지를 둘이 섞어가며 관객에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대서사가 판소리의 구성요소다. 이따금 부채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눈길을 끌기도 한다. 그래도 판소리 공연 내내 관중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리꾼의 피 토하는 듯한 소리에 같이 가슴을 치고, 요염하게 농익은 소리에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꾼이 부르짖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눈 앞에 그리며 따라가게 된다.


반면, 플라멩코는 가창과 기타 연주에 화려한 춤까지 가세하며 판 자체를 좀 더 크게 벌이는 편이다. 때때로 플라멩코 기타연주자 없이 가수가 박수만으로 무용수와 호흡을 맞추기도 한다. 둘만 하는 공연임에도 그 소리와 역량은 공연장 전체를 휘감는다. 무대의 크기는 다양하다. 허름한 대폿집에서 가수와 무용수 둘만을 위한 의자를 두고 바로 코 앞에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수 백명은 족히 들어갈 곳에서 화려하게 군무를 선보이기도 한다. 아예 거리에서 버스킹으로 공연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노래와 연주, 춤 이 세 파트가 개별적으로 놀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듯 헤쳐 모여를 하며 하나로 녹아들어 관중의 심장을 쫄깃하게 쥐었다 폈다 한다. 


플라멩코 공연은 언제나 열정 그 자체다




플라멩코의 노래는 깐떼cante 라고 하며 플라멩코 가수는 깐따오르cantaor 라고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노래의 분위기는 귀 기울여 들어보지 않아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잔뜩 찌푸린 미간은 이미 내 천자가 자리를 잡았고, 훤한 이마에는 오선지가 그려져 있다. 입술은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릴 듯 크게 벌이며, 손은 항상 뭔가를 부탁하듯 비비기도 하고, 감싸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무용수와 연주자의 박자를 눈에 보일듯 말듯 리드 한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가는 가수가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도 하기 전, 목을 풀어내듯 '으흐응~' 하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서고 소름이 돋는다. 판소리 고장 전주에서 막 뽑아올린 춘향가 쑥대머리의 안달루시아 버젼이랄까. K-pop 이전에 국악이 예까지 왔는가 싶다. 음울한 기운이 구슬픈 선율을 타고 올라와 어수선 했던 주위는 일순간 긴장이 흐른다. 소울와 타령의 경계에서 단조 선율로 탁하게 내뱉는 깐따오르의 숨길만 나지막이 남는다. 마음에선 누군가에게 달려가 용서를 구하고 싶을 정도로 신음이 일렁인다. 스페인어도 아닌 집시의 말이라 알아들을리 만무하건만, 음악은 인종과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다.


구슬픈 깐떼에 마음이 미어져 갈 때,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인 또까오르tocaor가 기타를 탕 하고 두드리며 매듭을 짓는다. 구슬픈 선율에 젖어있다 정신을 차리니 현란한 기타 선율이 귓가를 강타한다. 연주는 스페인어로 또께toque 라고 하는데 우리에겐 그 어감만큼이나 이전의 기분을 남김없이 깨고 또 깬다. 또까오르의 눈은 본인의 연주에 심취한 듯 관객 한번 보는 일 없이 오로지 가수와 무용수 하고만 눈빛 교환을 할 뿐이다.


이어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등장하는 호리호리한 바일라오르(bailaor 플라멩코 남자무용수)와 기다랗게 끌고 나오는 화려한 주름치마의 바일라오라(bailaora 여자 무용수)는 서로 몸이 닿을 듯 말 듯 미끄러지듯 당겼다 풀었다 하며 품 안에 감춰둔 꽃송이를 연신 주고 받는다. 꽃은 저들의 눈빛과 함께 말을 전하는 도구이자 감정의 매개체이다.


무용수 마다 각자의 개인기를 선보이는 플라멩코 공연


무용수는 요란스레 발만으로 추지 않는다. 손뼉으로 잡아내는 빨마스 (Palmas), 손가락 끝으로 퉁기는 삐또스 (Pitos), 그 뿐 아니라 지팡이를 이용해 바닥을 치는 골뻬스 (Golpes), 마지막으로 가수, 연주자, 무용수, 심지어 관객까지 공연에 흠뻑 빠져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는 추임새 할레오 (Jaleo)에 이르기까지. 먼 이방 땅인데도 추임새가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들과 우리는 분명 다른데도 의외로 닮은 꼴이 제법 보여서일까. 한국인에게 스페인의 문화와 음식은 별 불편함 없이 다가온다. 판소리와 사물놀이가 연주자와 관객의 거리가 없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 플라멩코도 관객과 자연스레 하나가 된다.


중간에 짤막하게 선보이는 오페라 <까르멘> 또한 세비야의 플라멩코 공연만이 지닌 특징이다. 프랑스 작곡가 조르쥬 비제가 작곡한 <까르멘>의 배경이 바로 이곳 세비야이기 때문이다. 점점 다채로워지는 공연의 흐름에 눈과 귀는 진즉부터 홀린 상태다. 어렸을 적 짝짝이라며 유치하게만 보던 캐스터네츠는 이 곳에서 마법의 도구가 된다. 보고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양손에서 재빠르게 훑어내리는 리듬에 심장 박동은 끝없이 오른다. 어르신의 지팡이 마저 여기선 타악기가 되어 나와 멋지게 바닥을 두들기니 우리의 눈과 귀와 심장은 저들에게 압도당한지 오래다.


공연자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희노애락은 얼굴에서만 나오는게 아니다. 저들은 머리부터 손끝이며 발끝까지 모든 감정을 지르고 조이고 터뜨린다. 무용수들은 관객들이 본인에게 완벽히 매료된 것이라는 걸 경험상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긴장감을 전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구슬프면서도 특유의 도도함이 묻어나는 눈빛이 남녀 무용수 모두에게 보인다. 절제된 손놀림에서 조차 때로는 분노로 핏줄이 선 손가락이 보인다. 앙상한 가지 마냥 뻗친 손가락이지만 그 호소력은 흑판마저 긁어 낼 기세로 가득하다. 공연장 제일 앞에 앉은 아들과 아빠의 눈은 정신이 없다. 무용수의 우월에 찬 얼굴, 긴장된 손끝, 강한 발놀림, 그 뒤에서 애끓는 소리를 전하는 가수의 주름진 얼굴, 거기에 악보 하나 없이 완벽하게 그 날의 곡을  꿰고 있는 연주자의 손 사이를 쉬임없이 오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집트 여인을 연상시키는 진한 마스카라의  애틋한 눈길은 무용수에게서 나와 넋 나간 관객의 어깨로 던져진다. 잡생각이라곤 일체 할 틈을 주지 않는 저들 앞에 왠지 나는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것 같다.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탁자 위에 한 남자 무용수가 올라간다. 순간 적막이 흐르다 12기통 엔진을 단 듯 폭발적으로 상을 박차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노래도 연주도 관객의 숨소리도 멈췄다. 오직 그의 구두와 탁자의 부딪히는 소리만이 공연장에 존재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속에 그의 발 구르는 속도며 테크닉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다들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질 줄 모른다. 저세상급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의 환상적인 공연이 끝나고 차분히 그의 발구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왜 저들은 땅으로 파고 들어갈까 하는 물음표가 생겼다. 세상 어느 춤에서든 얼굴부터 시작해 손과 발은 항상 하늘을 향하고, 슬픔조차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하거늘. 심지어 다리와 발만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아이리쉬 댄스 마저도 경쾌한 스텝으로 무대를 트램폴린 삼아 통통 튀어오르지 않던가. 헌데 왜 안달루시아 세비야에서 펼쳐지는 집시의 플라멩코만은 유독 오만상을 찌푸려 가며 애꿎은 바닥을 파고 있는 것인가.

플라멩코의 하이라이트, 탁자 위 단독 공연


사람대접 못 받고 떠돌며 멸시받는 저들도 실은 정착해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소망이 춤을 통해 발현된 게 아닐까. 인간이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그저 떠돌이, 부랑자로만 낙인 찍혀 살던 설움이 술 대신 춤을 통해 응축해 오다 마침내 두엔데(duende, 황홀한 순간 맛보는 절정의 상태)로 터져 나온게 아니었을까. 그 절정은 나를 물아일체, 아니 땀에 흠뻑 젖은 곱슬머리를 거친 숨소리와 함께 털어내는 공연자와 하나가 되게 한다. 십년 넘게 이방인으로 표류하던 삶에 대한 투지를 재점화하는 순간이다. 이어나오는 박수 갈채와 나지막한 탄성, 올레 olé.


그렇다. 플라멩코는 다른 누구를 위한 공연이 아니다. 삶의 무게에 지친 나를 위한 공연이었다. 답답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에 눌리며, 분통 터지는 일에 가슴 미어질 때, 주저하지 말고 진득하게 땀에 절을 정도로 풀어내 보라 한다. 속으로만 삭이지 말고, 밖으로 소통하라고, 자신있게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라고 박수를 쳐준다. 이 또한 지나갈 일이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다며, 자신의 어깨를 내어준다. 


아빠와 아이들도 즐겼지만, 공연자 본인들도 무척 흡족해 보인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라도 한 것 마냥 미처 닦을 틈 없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은 그 순간을 위해 오롯이 살아온 자기 자신이었다. 플라멩코의 열정을 받아 여정 중 어느샌가 풀려버린 신발끈을 다시 한 번 질끈 묶고 힘차게 출발해 본다. 


플라멩코 무용수의 화려한 피날레


삶의 투지를 되찾은 공연 플라멩코, 남녀 메인 무용수와 함께. 긴장한 아이들.


큰 아들 방문에 붙여진 무용수의 싸인이 들어간 플라멩코 공연장의 사진


매거진의 이전글 스페인 여행의 종합선물, 세비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