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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Feb 05. 2021

스페인 여행의 종합선물, 세비야

먹고 보고 듣고 타고 ... 

스페인에서 새해는 지난 지 한 달도 더 되었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새해가 있다. 다음 주면 맞이할 설이다. 

어렸을 때 명절이 다가오면 기다려지는게 있었다. 큼지막하게 안겨지는 종합선물세트. 각진 상자나 바구니에 그득그득 담겨있는 과일과 과자들. 그 사이즈와 가짓수에 뭐가 들었든 상관없이 일단은 행복해 어찌할 줄 몰랐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사는 곳도 달라지고, 철없던 어린이에서 그런 철없는 어린이를 둔 애아빠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 때 그 행복의 느낌이 남아서 지금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한다면 일단 큰 것부터 보게 된다.

 

여행을 이런 종합선물에 비춰보면 무엇이 될까. 까도 까도, 아니 꺼내도 꺼내도 화수분처럼 계속 나오고, 부스러기 과자만 아니라, 비스켓, 쿠키, 젤리처럼 종류도 다양하다면 그 기쁨은 더 클 것이다. 여행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듣고 먹고 체험하는 등 오감을 고루 충족시켜준다면 그 감동은 더하지 않을까.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 언제 봐도 감탄은 마르질 않는다


세비야는 그런 점에서 내겐 둘도 없는 종합선물로 한아름 안겨주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이다. 봄철이면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도시 자체가 내뿜는 화려한 색채가 눈을 사로 잡는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보랏빛의 자카란다가 한껏 흐드러지게 피어 가로수를 담당하고 있는가 하면, 곳곳에 몇 겹의 세기를 껴 입었을 보리수가 널찍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오렌지 꽃의 진한 향기가 숨막히도록 황홀하다. 거리마다 심겨진 이름모를 화사한 나무와 꽃들도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게 만든다. 눈이 호강을 한다. 


뜨거운 여름이 되면 햇볕에서 목이 타고 지친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고, 몇 모금 넘기면 딱 기분 좋을 정도로 텐션을 업시켜주는 상그리아Sangria를 마셔야겠다. 아이들에게 권하지 못할 아빠와 엄마만의 특권인데 여기서 잠시, 그 이름이 상그리아 인가 샹그리아 인가, 도대체 무엇이 맞는가를 한번 살펴 봐야겠다. 어떻게 말하든 물건 파는 입장에서야 다 알아서 듣겠지만 그래도 사소한 차이 하나가 나름의 '격'을 만들어 내는게 있지 않겠는가. 


일단 결론은 상그리아 Sangria 다. 상그리아는 피를 뜻하는 상그레Sangre에서 나왔다. 원래 와인부터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성혈이라고 까지 했다. 와인 재배 면적 세계 1위인 스페인에서 - 혹시 프랑스나 이태리 또는 미국이라고 알고 있었다면 이제는 스페인으로 바로 잡아주자, 갑자기 와인부심 뿜뿜이다 - 밋밋한 물 대용으로 저가의 와인을 차갑게 마시면서 여기에 과일과 설탕, 그리고 탄산수까지 혼합해서 지친 여름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게 상그리아다.


그렇다면 '샹'그리아는 뭘까? 아마도 '샹그릴라' 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혼용해서 쓴듯 싶다. 샹그릴라는 음료가 아니다. 제임스 해밀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티베트 고원의 쿤룬산맥(헉!) 어드매엔가에 있다고 하는 가공의 장소이다. 물론 여행 매니아에게는 전 세계에 65개나 지점을 두고 있는 샹그릴라 호텔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렇게까지 다르다 해도 한번 굳어진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 샹그리아, 샹그릴라... 아무러면 어떠랴, 달콤하게 맛보고 즐겼음 되는 것이지.


(좌측) 샹그릴라 Shangri-La, 책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 / (우측) 상그리아 Sangria, 입으로 타고가는 환상의 음료


어른들만 즐거우면 되겠는가. 아이들에게는 방금 짜낸 생 오렌지 쥬스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고도 상큼하다. 그 뿐인가. 이태리에 젤라또gelato가 있다면 스페인엔 엘라도helado가 있다. 입맛대로 골라 먹으며 잠시 테이블에서 그간 찍었던 사진을 보며 재충전해 보는 건 어떨까. 눈에 이어 입도 즐거워지는 순간이다. 아, 물론 그 빈틈을 노리는 소매치기는 언제나 경계해야 하니 테이블에 휴대폰을 올려 놓은 채 있다든지, 가방을 의자 뒤에 둔다든지 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눈 앞에 펼쳐지는 대성당과 알카사르 왕궁. 시간의 타임머신 속에 21세기의 나는 어느새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나는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가 하면서도 정교함과 화려함,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과거 장인들의 역작을 보며 인간의 위대함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각종 장식과 조각들을 보고 있노라니 책에서만 보던 수많은 용어와 갖가지 사건들이 퍼즐을 맞추듯 저마다의 상징이 머리에 들어온다. 


세비야의 대성당, 스페인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도 제일 큰 고딕양식의 대성당이다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라더니 정말 그간 읽었던 글과 이야기가 눈앞에서 재현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공부할 때는 이해도 못한채 외워야만 해서 지끈지끈 했는데 하나의 이야기로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 듣듯 풀려가는 스토리텔링에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더불어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이 아이에게 평생의 자산으로 남을 경험이 되니 아빠로서도 뿌듯하다. 




왕궁 근처엔 옛날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어렸을 적 구연동화 테잎에서나 들어보고 <크시코스의 우편마차> 라는 피아노 소곡집에서나 접해본 그 마차가 마부와 함께 손님들을 기다린다. 21세기에 무성영화 셋트장에 온 것인가 하는 기분에 한번 들뜬 감정은 좀처럼 내려앉질 않는다. 마냥 신기했던 기분은 마차에 오르자 현실이 된다. 더는 녹음된 소리가 아닌 따가닥 따가닥 거리며 귓가를 자극하는 경쾌한 갤럽에 아이들은 저마다 신이 났다. 아빠와 엄마는 마차에 허리를 기대고 피곤한 다리 번갈아 주물러 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호젓한 기분을 내자 여행지에서의 경험치가 기분좋게 올라간다.


마차 투어 중 아메리카 광장에서 잠시 포토 타임을 가지는 말과 마부들


마차는 시내를 나와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다 공작부인이 1893년 세비야 시에 기증한 마리아 루이사 공원에 들린다. 공원에는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여기저기 잔디밭에 앉아서 간단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공놀이를 한다. 아예 팔베개를 뻗어 낮잠을 취하는 이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화려하거나 근사하거나 세련되 보이는 것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다. 특히나 공 하나에 묻어 나오는 온 가족의 화기애애한 웃음 소리는 너무도 순수하고 소박해서 여기가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가 맞는가 싶을 정도이다. 잠시 우리나라의 8, 90년대 공익광고가 재현된듯 했다.


아메리카 광장을 지나 김태희의 플라멩코가 선을 보이던 장소이자, 영화 <스타워즈2>의 배경인 이색적인 장소, 스페인 광장에 도착한다. 안달루시아의 맹주란 별명에 걸맞게 호방한 세비야의 기상이 그대로 녹아든 이곳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광장으로 손꼽힌다. 스페인이 이슬람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기 이전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왕국을 상징하는 4개의 다리에는 여행객들이 저마다 추억할 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하다 


윗층 발코니에서 바라본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


현재 관공서로 쓰이는 건물의 기둥 아래에는 알바세테부터 사라고사까지 알파벳 순으로 나열된 48개의 주요도시가 타일장식과 지도로 꾸며져 있다. 특정 도시 앞에서 지도를 가리키며 뭔가를 전달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현지인들을 보니 예외없이 그 도시 출신 사람들이다. 우리는 공항에서부터 우리나라 브랜드를 보며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이들은 나라보다도 자기 고장에 대한 애향심이 남다르다. 48개의 도시를 면면히 살펴보니 한 자리에서 스페인 일주를 마친 기분마저 든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의 도시별 타일 장식, 1808년 5월 나폴레옹 침입 당시 항전한 마드리드


저녁이 되니 저마다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바삐 향하는 발걸음에 부산한 마음 추스려 본다. 플라멩코 무용수들의 진한 땀과 꿈이 배어있는 열정적인 공연에 같이 녹아들고 나니 조금씩 풀려가던 오감은 마침내 화룡점정을 찍는다. 정점에 달하고도 공연 시간 내내 물개 박수를 치며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을 본 아이들은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다. 연주, 노래, 춤은 끝났지만 다시 인상깊은 장면을 복기해 보는 아이들과의 대화는 그 열기를 고스란히 불러들인다. 정열의 땅 스페인에서 가장 스페인답다는 인상을 한껏 안겨준 세비야. 그 세비야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보며 그 여운을 길게 간직해야겠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혼, 플라멩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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