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생활 필수 덕목 - 발타사르 그라시안
17세기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이자 작가인 발타사르 그라시안. 그는 감성을 한 스푼도 타지 않은 치밀한 이성을 바탕으로 지혜에 관련된 저술과 어록으로 유명한데, 그 중 하나가 다음의 말이다 :
고마운 사람 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잠시 3년 정도만 경험을 해 보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한 해외 생활이 어느새 5년 10년을 넘어 15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에겐 여전히 미지의 나라인 슬로바키아, 반대로 너무 많이 알려져 정작 제대로 된 정보 보다는 온갖 카더라가 난무하는 스페인. 두 나라에서 겪은 인생의 경험은 나이의 나이테만큼이나 사람과 세상을 보는 시선에 여러 겹의 스펙트럼을 갖게 만들었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이는 나 자신만 봐도 너무도 명확하기에 부인할 수 없다. 이타적일 때도 있지만 이는 주위 환경을 통해 학습화된 것이라고 본다. 여유 있고 좋은 상황에서는 남에 대한 배려도 생기고, 인간미 넘치게 베풀며 살아가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남이야 어찌되든 일단 나 살기에 급급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평소 내 기반을 든든히 다져두고, 내 실력을 제대로 마련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세워두지 않으면 아무리 남을 돕고자 해도 오히려 빈축만 살 뿐이다. 내 힘을 제대로 길러야 남도 도울 수 있는 법이다.
반대로 해외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접근해 오는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맨 땅에 헤딩한다는 건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빌 언덕만 보이면 염치 불문하고 물어보고 도와 달라하며 긴밀히 연락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면, 빠르면 반 년, 못해도 일 년이면, 대충 이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가 보인다. 흔히 말하는 '감'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그 사람에게 전처럼 자주 전화하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혼자서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그것도 괜찮다. 육아의 최종 목표는 건강한 독립에 있는데, 하물며,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고국을 벗어나 살아보고자 결심한 성인이라면, 스물, 서른 넘은 어른으로서 당연히 홀로서기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관계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만 쏙쏙 빼먹은 뒤 연락을 뚝 끊는 것이다. 만나서 같이 맞대고 기대어 사람 인人을 형성해야 하는데, 사람이 아닌 도구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 경우를 한 두 번도 아니고 몇 번 당했는데, 당할 때마다 놀랐고, 분노했으며, 허탈함과 회의감 마저 느껴졌다. 사실 그건 그를 탓할 일이 아니다. 한 번 당하면 속인 사람이 나쁜 거지만, 두 번이면 속은 사람도 미련하고 바보라는 걸 익히 잘 안다.
내가 이만큼 도와주며 고마운 사람이 되었으니 저 편에서도 내게 인간적인 정情을 주기를 바라는 욕심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니 이제는 나도 어쩌면 그런 류의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마저 들 땐 몹시도 입안이 쓰고 마음이 허해지고 만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 받듯, 나 또한 타인에게 부지불식 간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현인 발타사르는 주변에 나 같은 푼수를 허다하게 봐서일까. 이미 400년도 전에 '고마운 존재 보다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다소 인정하기 싫은 냉정한 말을 남겼으니 말이다. 정말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고 싶지만, 현실감각은 우주 저 편에 두고 와 버린, 그래서 매일을 일희일비 하며 철부지로 살아가는 자에게 발타사르는 있는 힘껏 글로 깨고 있는 중이다.
착하고 고마운 사람의 페르소나는 이제 벗고 싶다. 봄의 꽃이자, 여름의 시원한 강이며, 가을의 고운 단풍, 그리고 겨울의 따스한 햇살이 된다면, 나는 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필요충분의 존재로 자리매김이 될까. 쓰고 나니 헛된 욕심이며 허영만 잔뜩 들어간 풍선인 듯 싶어 두렵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공기만 가득 차 부풀다 뻥 하고 터지거나, 빵빵하게 채워진 물 때문에 찔리면 다 쏟아내 버릴 것만 같은 형국.
복잡다단한 감정의 터널을 지나 다시 발타사르의 어록으로 돌아온다. 영어 강사로든, 가이드로든 일하면서 제일 기분 좋았던 칭찬은 '스페인에는 선생님 같은 분이 필요해요.' 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아니다. 나에게는 스페인이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 신이 허락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스페인,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미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 있는 스페인, 따뜻한 사람들이 남긴 문화유산이 곳곳에 가득한 스페인.
스페인을 필요로 하는 나에게 스페인은 아낌없이 주었다. 아직 되갚어야 할 타이밍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어수선하고 지지부진하다. 그렇지만 나와 내 가정에 행복을 안겨 준 스페인을 그냥 멀뚱히 바라만 보며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경험한 멋진 에스빠냐를, 아름다운 에스빠뇰레스를, 시간을 넘어 찬란히 빛나는 스페인의 문화유산을 부지런히 글로 남겨야겠다. 고마운 존재를 넘어 필요한 존재가 되어 준 지금도 살고 있는 이 땅, 스페인을 말이다.
*사족으로... 이토록 유명한 말이니 당연 영어는 물론 원어인 스페인어로 있을거라 믿었다. 하여, 원어가 주는 뉘앙스를 음미해 보고자 열심히 구글 검색을 했지만, 백 여개도 더 되는 그의 어록 중에서 못 찾았다. 없는 건지 내가 못 찾은 건지 모르겠지만, 순간 워낙에 우리나라에서만 통하고 당사자의 나라에선 모르는 명언이나 예화 등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걸 경험한 터라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격언은 출처와 상관없이 충분히 곱씹어 볼 만한 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