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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Feb 22. 2021

스페인에서 제일 큰 세비야 대성당, 콜럼버스를 만나다

끝없이 나오는 볼거리와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

그저 휘황찬란 하다는 표현만으로는 2% 부족하다 느껴지는 세비야 대성당의 내부 성가대 뒷편에서 각종 예술품과 같은 조각과 회화, 성물을 보며 아득해 지던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바닥에 누군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이 새겨져 있다. 살펴보니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인 에르난도 콜론 (페르디난드 콜럼버스)의 무덤이었다. 탐험가인 아버지의 위업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겨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극과 극을 이룰 정도로 다르다. 199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은 <1492 낙원의 정복> 이란 영화를 제작했는데, 우리나라에선 <1492 콜럼버스>로 알려져 있다. 상영 당시 영화 광고로 콜럼버스, 그는 영웅인가, 약탈자인가로 양분화된 시선을 소개해 준바 있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가 구술해 주는 내용을 적으며 다시 곱씹어 보았을 그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아울러 기록으로, 자료로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되새김질 해 보게 된다.


콜럼버스 아들, 에르난도 (Don Hernando Colon) 의 무덤 동판

발걸음을 옮겨 콜럼버스의 무덤이 있다는 곳에 가보니, 엄숙해야 할 성당에서 나름의 재치를 보게 된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곳을 인도로 믿은 콜럼버스는 (그래서 더 이상 미국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부르지 않지만, '서인도 제도'라는 말은 여전히 지도에 남아있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접견 부터 시작해 네 차례의 항해를 마치기 까지 끊임없이 스페인 대신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겪었던 바,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얘기는 정설은 아니지만,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도 아닌 이태리 제노바 출신의 이방인으로서 그가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니 비록 공식적인 문서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았음에도, 훗날 스페인에서 투옥까지 당하며 고초를 치룬 그의 생애와 독불장군과 같은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는 학을 떼며 얘기했을 것이 분명하다. 스페인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를 당시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의 유해는 산토 도밍고와 쿠바를 거쳐갔다.


그러다 스페인에 귀환하게 되었는데, 묻지 말라던 유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아예 공중에 띄운 그들의 생각은 진지함과 (본의 아니게) 유머러스함을 둘 다 갖고 있다. 이래서 야사가 정사 보다도 사람들의 귀를 자극하는 것인가 싶다. 앞 뒤 두 명씩 네 명이 관을 맨 모습은 그 와중에도 온갖 상징을 다 갖추고 있다. 


앞에 당당한 두 인물은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휘장을 두르고 있다.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 (또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적극 후원해 주고 교류했던 이사벨 여왕이 다스렸던 곳이다. 남편인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을 다스렸는데 둘이 결혼을 했음에도 나라를 합병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살림은 유지한채 영토만 합쳤던 터라, 서로 주머니 사정은 알아서 챙겨야 했다. 


페르난도는 항구도시인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지중해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나, 아내 이사벨에게는 미지의 세계인 대서양만을 바라봐야 했던 터라, 대서양을 통해서도 인도를 발견할 수 있으며 (아프리카를 통해 가는 길은 이미 포르투갈이 선점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원하던 향신료를 가져올 수 있다는 콜럼버스의 설득은 밑져야 본전 이라는 계산과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좌측 크리스토포로 성인 벽화, 우측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관


일단 앞줄 좌측에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쫙 편 가슴, 해상왕국임을 증명하는 노, 가슴의 문장에는 성채 (카스티야 Castilla) 가 있는 카스티야 왕국을 보라. 그가 쓴 왕관도 성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앞줄 우측에는 기독교 왕국임을 천명하는 십자가, 이슬람 왕국들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루며 승리로 이끈 창, 창 끝에 찍힌 석류 (스페인어로 그라나다Granada 라고 한다, 즉 1492년 카톨릭 스페인 왕국이 최후의 이슬람 왕국을 정복했음을 의미한다), 가슴에 있는 사자 문장, 바로 레온 왕국이다. 


잠깐 곁가지로 가자면, 사자가 스페인어로는 레온 León 인데, 뭔가 떠오르는 비슷한 제목의 프랑스 영화가 있을 것이다. 바로 레옹 Leon, 살인 청부업자의 이름이 사자라니, 허 참. 여하간, 이 둘은 딱 봐도 폼생폼사다. 뒤에 둘은 콜럼버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페르난도 2세가 다스린 아라곤과 나바라 왕국으로, 왕국의 휘장을 두른 인물들이 고개를 떨군채 관을 떠받들고 있다.


이쯤되면 꼭 질문이 따라오는게 있다. 관이 생각보다 작아 보이는 까닭에 정말 콜럼버스가 저 안에 들어 있느냐 라는 것이다. 일단 공식적인 답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신빙성에 의문을 갖곤 한다. 콜럼버스는 살아 생전 보다 죽어서 더 많은 여행을 떠났다. 


그의 시신이 거쳐간 곳만 살짝 살펴보자. 일단은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죽고 묻혔지만, 그는 그가 발견했던 신세계 (지금의 아메리카를 말한다. 반면, 유럽은 '구세계'라고 한다) 에 묻어달라는 유언 때문에 보냈지만, 그걸 감당할 만한 시설이 없어 세비야의 라 까르뚜하 섬에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 도밍고의 대성당에 묻혔다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눌리는 바람에 빼앗길 것을 두려워 하여 그를 현재 쿠바의 아바나 (또는 하바나)로 이장시킨다. 그러고서 최종적으로 스페인의 세비야로 와서 묻히게 되었다. 어느 누가 죽고 나서 이렇게 다섯 군데나 돌아다니며 때아닌 유람을 해 보았을까. 아마도 콜럼버스가 유일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거쳐간 도시며 나라마다 전부 콜럼버스는 자기네 땅에 묻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급기야 스페인의 세비야에서는 DNA 조사까지 마쳐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했지만, 여전히 도미니카와 쿠바에선 어림 없는 얘기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500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의 일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산 사람이나 잘 챙기면 될 것을. 요즘과 같이 갈수록 더 어려워져 가는 시국에 한 번 더 꼬집어 생각해 보고 싶은 대목이다.  




한편, 콜럼버스의 관 옆에는 어깨에 어린 예수를 짊어지고 길을 걷는 여행자의 수호성인 크리스토발 (영어로 크리스토퍼, 카톨릭 성인명으로는 크리스토포로) 이 크게 그려져 있다. 이 크리스토발은 특히나 어느 성당에서든 순례자를 맞이하는 분으로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버스 기사들 중에 이 크리스토발 성인의 스티커를 붙여 놓거나 목걸이 등을 걸어 놓는 걸 심심찮게 보기도 한다. 


여행자의 수호성인과 죽어서까지 여행자로 평생을 살아온 분, 거기에 지금 여행을 진행 중엔 우리가 있으니 여행의 삼위일체를 완성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나온다. 크리스토포로든 크리스토퍼든 크리스토발이든 간에 동명이인을 배치한 것도 어찌보면 탁월한 신의 한 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알지 못하는 곳에 내던져진 우리의 삶부터가 기실 이 땅의 여행자 또는 방랑자가 아니던가. 타이틀이 무엇이든 간에 방황만 아니라면 괜찮을 듯 싶다. 무엇보다도 이렇게까지 여행자의 평안을 지켜주는 성인을 두어 여행객인 우리를 맞이하다니, 객지에서 지친 아이들과 아빠에게 이보다 더한 배려도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성당에서 종교를 떠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을 만날 줄이야. 여행은 예상치 못한 만남에서도 선물을 얻는다. 아직도 세비야 대성당의 볼거리와 스토리 텔링은 한가득이다. 다음으로 이어가야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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