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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r 29. 2021

죽음을 대하는 스페인인의 자세

그리고 나의 자세

Él murió. 그는 죽었다.

Él falleció. 그는 돌아가셨다.


2년 전 이사를 처음 오던 날, 바로 옆집에서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 준 스페인 가정이 있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시는 노부부인데 딸과 손자도 같이 데리고 계셨다. 딸이 이혼하고서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 들어와 살고 있는 모습은 스페인에서 학생들 영어 과외하던 당시 종종 보기도 했다.


은빛 머리칼의 할아버지는 정정하셨고, 무엇보다도 푸근한 미소가 참 좋았다. 언제나 갈색으로 염색하시는 할머니 역시 친근한 미소로 대해주시곤 했다. 매일 저녁 8시면 베란다에 나와서 박수를 치다가 바로 옆 창가에 있는 우리와 얼굴을 마주치면 싱긋 웃었다. 크리스마스엔 아내가 쵸콜렛 상자를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나 오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마주 보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부턴가 안 보였다. 세상에나, 돌연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다. 갑작스런 악화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가 인사도 없이 떠나셨다. 우리에게 소식이 전해진 건 이미 장례까지 치르고 난 이후였다. 아파트 주민 전체가 조용했다.


이미 병원에서 진을 다 빼고 와서 그런지 집으로 돌아온 가족은 너무도 조용했다. 남편의 소식을 알리는 할머니는 담담하기가 서사 한편을 읊는 듯했다. 듣는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속상한데 당사자인 할머니는 그 또한 신의 뜻일지 누가 알겠느냐 싶은 태도셨다.


우리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하고, 아침저녁으로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가며 기분 좋은 인사말을 건네며, 귀엽다고 아이를 쓰다듬던 할아버지의 손길이 자꾸만 생각나서 혼이 났다. 평소 물처럼 맑으신 분이라 그런 걸까, 떠난 이후에도 밤하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말갛게 빛이 나셨다.




코비드19로 못 가던 스페인 교회를 근 1년 만에 오랜만에 찾아갔다. 모이는 수는 적어졌지만, 반가움은 못 보던 시간만큼 더 짙었다. 강당의 그랜드 피아노 덮개를 열고, 예배 시작 전 반주를 하는데 누군가 자꾸 눈에 밟혔다. 학교 교장을 역임하셨던 빅토리아 할머니.


늘 교회 오실 때마다 옷매무새를 워낙에 깔끔하고 단정하게 하시는 데다 머리도 근사하게 틀어 올리셔서 멋쟁이 할머니로도 이름이 나 있던 분이셨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셔서 외국인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스페인 사람과도 같은 분인 그가 그 큰 눈망울로 자꾸만 눈물을 떨구셨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는 오빠가 바로 전날 돌아가셨다. 오빠를 보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상황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울음뿐이었다. 목사님이 소식을 알려주셨고, 사람들이 예배 후 그분에게 다가갔다. 우리 부부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 사전에 나온 표현을 써야 하나, 안 그래도 오랜만에 교회 나와서 신경 쓰이는데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했다.


주저주저하다 제일 마지막에 다가간 터라 미안함이 더 컸다.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어깨 위로 손이 가며 쓰다듬어 드렸다. 할머니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리고 말씀을 쉬임 없이 쏟아놓으셨다: 너희가 이렇게 와 줘서 고맙다. 오빠를 보러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교회 나와 기도하고, 위로받는 것인데,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 네 피아노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네 아이들을 보면 조카들이 너무나도 생각난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던 나는 할머니가 고맙다며 힘주어 얘기할 때마다 내 눈자욱이 시큰거렸다. 조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오빠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할머니는 얘기를 하시며 점차 기운을 얻어가셨다. 브라질과 스페인 방역당국에 대한 책망과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한껏 토로하시고 나자, 교육자답게 교육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시며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에 방점을 찍으시는 할머니.


나는 아무 말도 한 게 없었다. 정말이지 눈물과 콧물로 때문에 빨리 자리를 뜨고만 싶었지만, 할머니의 하소연이자 소망이 뒤섞인 말씀은 할아버지가 가자고 할 때까지 끊어질 줄을 몰랐다. 눈물을 보이시면서도 목소리에 당찬 힘이 들어가던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내가 무얼 했나. 가만히 있는 가운데 눈 마주치며 들어드린 것 외엔 없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일들이 있었다. 내 힘으로 대처도 안 되고, 내 역량으로 변화시킬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건 내 과거였기 때문이다. 변경 가능하거나 수정 가능한 현재도 아니고, 계획과 구상 속에 다각도로 볼 미래도 아닌, 이미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지고 긁힌 과거의 일들과 그 당시에 느낀 감정들. 그때의 충격이며 스트레스가 감정의 문신이 되어 내 마음 곳곳에 먹선을 드리웠었다. 그 두려움에 평범한 글 조차 쓸 수가 없었다.


그 공포가 나를 집어삼키려는 찰나에 전해 들은 더 큰 죽음의 소식은 나를 잠시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그 무엇이 죽음보다 클까. 지금 느끼는 두려움이 과거로부터 온 것이든, 현재 눈 앞에 있는 것이든, 앞으로 있을 것에 대한 것이든, 죽고 나면 다 아무것도 아닐 텐데. 세상의 어떤 것도 떠나는 이는 가져갈 것이 없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그 감정에 여전히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다다르자 비로소 현재를 보게 되었다. 담담하게 보내든, 눈물 바람으로 맞이하든. 삶 가운데 어떤 일을 맞이하든 간에, 지금 이곳에서 나는, 죽음을 기억한다 -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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