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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r 31. 2021

어떻게든 버텨라

불가능해 보일 뿐 불가능은 아니다

여러분은 무화과 나무를 본 적이 있나요. 꽃 없이 열리는 열매 나무라니. 제가 그 나무라면 좀 속상할 거 같습니다. 꽃이 안 보인다고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낭만은 1도 없게 지어주다니요. 그치만 그런 투박한 이름과는 달리, 열매 모양은 알밤처럼 귀엽게 생겼고, 냄새는 겉에선 약하지만 쪼개보면 은근히 달달한 향이 있고, 먹어보면 부드럽고도 도톰한 과육에서 단맛이 챡 퍼지는 게 아주 일품이지요.


이 무화과를 처음 접한 건 성경이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쉬는 구절이 종종 언급 되었고, 신약 성경에선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나무이기도 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에게 무화과 나무는 아직 글자로만 존재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대학생 때 본 프랑스 만화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나오는 이집트 여왕과 순진한 소년의 이야기 편에서 무화과가 얼마나 달고 싱싱하며 맛있는 과일로 묘사되던지 (그렇게도 듣기 싫던 쩝쩝 거리는 소리가 이때만큼은 침샘을 자극하는 소리로 바뀌더라고요), 그걸 보고 부터는 저도 언제 한 번 그 맛을 경험해 보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바뀌었지요.

프랑스 만화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 중 이집트 여왕과 소년 이야기에 나오는 무화과


그런 무화과가 마침내 스페인에 오자 higo(이고) 라는 이름으로 슈퍼나 백화점은 물론 휴게소에서도 매우 쉽게 접하는 상품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작디 작은 만두 마냥 귀엽게 생겼는데, 잘 씻기만 하면 껍질을 벗길 필요 없이 바로 입 안으로 한번에 먹을 수도 있고, 조금 크다 싶으면 손으로 쉽게 쪼개서 두 번에 먹을 수도 있었죠. 과일이 얼마나 포실포실한지 솜을 만지는 느낌이고요. 그러면서 우리나라 곶감처럼 하얀 분이 묻어 있는 말린 무화과는 있는 그대로 먹기도 하고 쵸코렛 코팅이 되어 별미로도 즐길 수 있었어요.


그러다 열매가 아닌 나무를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제법 큰 아름드리의 나무들도 줄기를 지나면 가지들은 연하디 연한 경우가 많아요. 너무도 연해서 손가락만으로도 쉽게 부러질 것만 같지요. 그런데, 무화과 나무의 잿빛 가지들은 밭에서 비료 뿌리고 오시는 할아버지의 두툼하고 투박한 손마디가 연상될 정도로 굵었어요. 시원시원하게 쭉쭉 뻗은게 아니라 손바닥 길이 정도에서 방향을 꺾었습니다.


그렇게 꺾인 가지는 다시 또 한 팔 정도로만 뻗다가 살짝 꺾어 가며 다른 가지를 내어 놓았습니다. 뽕나무과에 속하는 무화과는 나중에 잎이 무척 크게 나오는데, 그렇게 잎이 다 자라 펼치기 전, 이미 가지만으로도 어느 정도 얼기설기 얽혀 있어 제법 그늘이 되겠다 싶을 정도에요. 근교 마을로 산책 나갔는데, 그곳엔 무화과 나무가 가는 발마다 채일 정도로 있었습니다.




저마다 얼마나 가지를 내뻗었는지, 얘네들 이렇게 가지만 무성히 내다가 열매는 커녕 잎이라도 제대로 낼 수 있을까 오지랖 떨고 있는데, 하, 가까이서 보니 어느 하나 예외없이 아주 야무지게 파릇파릇한 새싹을 내고 있더군요. - 인간아, 너나 잘 하세요. (넵)


심지어 그냥 땅도 아닌, 점판암으로 덮여 있는 순도 백 돌투성이의 땅 위, 아니, 단면의 틈에서 조차 저 무화과 나무는 소리 소문 없이 자기의 위치를 그 어떤 것보다도 단단히 자리매김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정신력이 있어야 저런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 걸까요. 


돌틈에 자리잡은 무화과 나무


사람은 비록 태어나는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닐지라도, 성장하고 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납니다. 주거 공간이든, 지식의 배움터든, 몸담아 일할 직장이든,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아예 바꿔 버리기도 합니다.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일절 무관하게 돌짝 밭에 떨어진 무화과 나무의 씨앗은, 자라면서도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순응을 하는 것으로 생을 시작합니다. 아 놔, 재수없게 하필 돌틈이 다 뭐야. 조금만 더 내려가면 평생 목을 축일 개울인데, 아니, 한 뼘만 옆에 떨어졌어도 돌탱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보드라운 흙인데, 거긴 양분도 가득한데, 이게 뭐람. 저라면 이생망 이라며 끊임없이 구시렁 대다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있는 그 자리를 순순히 받아 들입니다. 그렇다고 포기는 아닙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천천히 자신을 변화시켜 갑니다. 순응이지요. 그러면서 인내합니다. 물길을 찾으러 아래로 옆으로 계속해서 조금씩 틈을 파고 들어 갑니다. 위로는 햇빛을 받기 위해 줄기를 냅니다. 그렇게 애쓰며 시작한 그의 생은 마침내 무심히 지나가던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탄사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 놀라운 도전의 업적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상이 되었고 지금도 묵묵히 진행 중입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어디서도 없습니다. 오로지 어떻게든 버티고 버티고 버텨낸 결과입니다. 어쩌다 돌밭에 굴러 떨어진 무화과 씨앗의 환경은 절망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던 그 씨앗은 마침내 환경을 움직였습니다. 환경에 순응하더니 적응하고 이용하며 압도했습니다. 과정은 눈에 띄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연약한 생의 위대함은 비단 돌틈을 뚫은 무화과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습니다. 담벼락을 덮어버린 담쟁이도, 고목나무 틈새에 끼어 있는 이끼도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발도 없고, 날개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눈이 달린 것도 아니죠. 어디를 가야 맞는 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가야 보다 효율적일 수 있을까요. 아니, 이런 질문이 애당초 성립할 수도, 적용할 수도 없겠지요.


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알 수도 없고요. 식물에겐 당장 오늘 조차 먼 훗날의 미래와 같을 겁니다. 자기를 둘러싼 그 무엇인들 자기의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게 일절 없을테니까요. 그런데서 어떻게 살아남는게 가능할까요. 이건 대놓고 불가능이지 않나요.


제가 보기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들에겐 불가능 자체가 아니라 불가능해 보일 뿐 이었습니다.

다시 얘기합니다. 그건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능해. 보일. 뿐. 입니다.

이처럼 힘주어 얘기하는 걸 들어야 할 1순위는 누구일까요.


그야 물론 퍽퍽한 일상에 오늘도 변함없이 쟁기질을 하며 땅을 뒤엎어야 할 '저' 입니다.  



-스페인의 시골 마을 산책에서 마주한 것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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