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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02. 2021

수다의 힘

수다 떨다 영어 강의까지 가 버린 사연

2개월 전 어느 화요일 22시 22분.

브런치 작가인 후배와 브런치에 대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수다란 특별한 기점 없이 시작해 마찬가지로 특별한 마침 없이 끝난다. 사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아무말 대잔치를 편하게 할 수 있는게 수다지, 특별한 목적이 있으면 그건 협의, 미팅, 좌담회 등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 날 수다는 뭔가 특별했다. 의식의 흐름도 아닌 그저 변변찮은 일상을 두고 떤 수다가 한 시간 반이 지나자, 후배는 나에게 줌으로 스페인어 강의를 해 주겠다는 뜬금없는 제안으로 바뀌었다. 아, 아무리 선배라도 그냥 받아 먹을 수만은 없지. 나도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이 무슨 갑분공인가 싶은데, 아싸인 우리 둘은 서로 좋다고 재미있겠다며 짝짜꿍이 맞았다.


말로 먹고 사는 한량은 실행력이 좋은 법이다. 그래야 제대로 한량놀이를 이어갈 수 있다. 월화수목, 일주일에 네 번씩, 한 번 수업에 한 시간씩 하기로 했다. 남들 다 하는 미라클 모닝 까지는 아니어도 (사실 새벽에 일어나는게 어떻게 '모닝' 인지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그냥 '모닝' 만이라도 하자며 오전 10시 시작으로 잡았다. 간단히 구글 미팅으로 3개월치를 짜고, 메일을 보냈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내가 영어를 가르치고, 화요일과 목요일은 후배가 스페인어를 하기로 했다.


얼마만에 다시 시작해 보는 수업이던가. 이게 뭐라고 또 뭐라고 심장은 이리도 나대는가. TEFL 자격증이 있고, 현지인들 앞에서 강의도 하고, 수십 명의 한국분들 앞에서도 몇 시간이고 설명을 이어가던 나였는데도, 일 년 남짓 쉬고 다시 시작하려니 쑥스러움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라이브 방송으로 강연하는 분들, 존경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수업이 어느새 6주차를 맞이했다. 딱 한 번, 이번주 월요일 영어수업을 사정상 못했지만, 그건 내일(오늘) 금요일에 보강을 하기로 했다. 신기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이 오간 건 더더욱 아닌데, 매번 시작할 때마다 기대가 되고, 하는 중엔 재미가 넘치며, 마치면 다음 날 수업이 기다려 진다. (이거 저만의 착각이 아니겠지요, 후배님)


긴장을 풀고, 마음을 풀어 놓는 수다에서 우리는 생각도 못한 강의의 안드로메다로 나갔고, 그 곳에서 우리는 코로나가 앗아갔던 삶의 활력을 되찾고, 언어 공부와 강의라는 실질적인 도움까지 얻었다. 우리의 수다는 삼천포로 빠진 정도가 아니라 삼천포에서 아예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이건 분명 수다였다




수다의 힘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공심재 필사모임, 따스한 문장에 올라온 좋은 경구들을 토대로 나눈 부담없는 수다와 응원은 나를 해외 작가들이 쓴 원어 문장을 검색하는 길로 인도해서, 문장을 보다 깊이 음미하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공심재를 통해 만난 수다의 파장은 제법 길었다. 공심재에서 마련한 3월 강연을 들으며 느낀 점을 한 두 마디 적었을 뿐인데, 강연이 끝나자 다음 달 스페인 여행을 발표하라는 바톤을 전달 받았다, 아니, 개최자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제 보름 밖에 안 남았다, 헉.


보통 일방적인 통보라면, 그것도 남들 앞에서 하는 발표라면, 기분도 나쁘고, 배려도 없다며 불쾌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알던 분들과 수다 떨다 나온 얘기라 그런지 (아직도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냐며 어버버 하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스페인을 소개해 준다는 설렘에 벌써부터 심장은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기실 내가 브런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수다였다. 인스타에 쓰던 일상 수다 글밭에서 먼저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Jairo 작가님 소개 덕에 이렇게 들어와 좋은 분들을 만났다. 그 뿐인가. 브런치 작가들의 다채로운 글을 읽으며 생각 한 번 더 해 보고, 댓글 보며 같이 웃고, 어깨 토닥여 주며 서로 성장하고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유의미하게 보내고 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너무 심각하고 진중하기만 하며 재미라곤 별로 없는 그저 범생이로서만 자란 사람이었는데, 대학생 시절 나와는 너무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달라졌다. 그 변화에는 수다가 자리잡고 있음을 확신한다. 학창시절에서 스무해도 훌쩍 넘은 지금, 너스레는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고, 나 자신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돌무데기로 경직된 마음을 부지런히 갈아 엎어 주었다. 수다와 너스레 사이에 범생이는 어느새 한량이 되었다. 


그렇게나 딱딱한 마음의 굳은살을 풀어주고 덮어주며 새살 돋게 만든 밑도 끝도 없는 수다. 하지만 그 수다 보다도 더 대단한 게 있다. 별 것 아닌 내 말에도 깔깔거리고 박수치며 계속 응응 하며 호응해 준 건, 사실 내 말이 정말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는 것도 없이, 다만 관심과 격려를 보여준 내 앞의 당신이 마음을 크게 써 준 덕이다.


수다의 힘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오늘도 나의 수다를 읽어준 당신에게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사진은 저희집 앵무새 삐꼬와 둘째 녀석이 만든 종이 앵무새입니다. 수다 하니까 앵무새가 떠올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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