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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05. 2021

만나고 노는 일에 진심

먼저는 바람이 되어야겠다

스페인에선 한 학년이 삼학기이다. 여름방학은 두 달 넘게 길지만, 겨울방학을 2주 정도의 크리스마스 방학과 열흘 남짓한 부활절 방학으로 나누어 가진다. 그래서 보통 9월에 새 학년 첫학기가 시작되고, 3개월 정도 지나 12월에 성탄 방학을 보름간 갖는다.

다시 1월 초에 개학해 2학기를 맞이해 두 달 반 정도 수업을 한다. 이후 4월 전후로 열흘 남짓한 부활절 방학을 보내면 마지막 3학기를 6월 중순 경까지 갖는다. 무사히 마지막 학기를 마친 후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지 유급이 되어 1년을 더 배울지가 가름이 난다.

여기까진 응 뭐, 그래, 그러니? 정도로 넘어가는데, 화들짝 놀라게 되는 사실이 있다. 그 유급제도의 적용이 무려 초등학교 3학년부터라는 점이다.


이런, 교육 얘기를 하려는게 아닌데, 부활절 방학 얘기를 하려다 그만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의 부활절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작년에는 아예 이동 자체가 안 됐다. 그러다 올해는 비록 지역 이동은 막혔지만, 그래도 마드리드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다. 여느 때 같았음 바지런을 떨며 스페인 남부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보고 있거나, 그라나다에서 알람브라를 돌며 따뜻한 봄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또는 휴가를 내서 가족과 같이 편히 쉴만한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 마침 재작년의 부활절 때 사진첩을 들춰 보니 마요르카 호캉스로 쉼을 가졌다.




그렇다면 올해는 어떻게 보냈나. 한량으로 먹고 노는 일, 특히나 사람 만나며 시간 보내는 일에 열심이었나 싶을 정도로 열흘 중에 딱 하루만 빼고 계속 사람을 만났다. 나 혼자서 친구를 불러 만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족을 다 대동하고 나가서 서로 가족 단위로 만나서 먹고 얘기하고 놀았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제법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다고 이런 만남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다들 육아하느라 바빠서, 코로나 때문에 더 아이들을 잘 케어해야만 해서, 정신없던 와중에, 엄마들이 일종의 공동 육아 마냥 같이 만나서 잠깐 시간 보내자고 한 게 반나절을 기본으로 아침부터 시작해 밤까지 종일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소풍도 하고, 하이킹도 하며 몸도 마음도 알차게 채워갔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달랐다. 만난 장소가, 만난 사람이, 만나서 하는게 달랐다. 아이들은 만나서 서로 놀고, 부모들은 얘기를 나누고, 때로는 식사를 동원한다는 건 있었지만, 이야기하는 주제가 매번 달라지는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전에는 보통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 사람과도 얘기해 보고, 저 사람과도 얘기했는데,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그렇게 하고 보니 마치 말하기 조차 복사+붙이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첫날만 지나도 바로 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급격히 적용되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문득 이건 아니지 하는 자각이 들었다. 이러려고 내가 사람 만났나?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 말하기의 연습 상대도 아니고, 아무리 공동 육아며 자식들끼리 서로 친구이니 오랜만에 만나서 같이 즐겁게 놀아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부모들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며 서로의 아까운 시간을 그저 향방없는 수다로 흩뿌리며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다. 이왕 수고하며 만난 건데, 서로 다음에도 기꺼이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내 마음 가짐을 달리하니 사람과의 대화하는 내용이 -때로는 비록 한바탕 웃고 가는 수다일지언정- 새로워졌고, 그런 만큼 말을 할 때도, 들을 때도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한지를 귀 기울여 들여야 비로소 맞장구를 칠 수도 있고, 나도 얘기를 보태며 어떤 주제의 대화이건 핑퐁을 치며 즐겁게 이어갈 수가 있었다.


수다와 대화의 경계를 허무는 자리에서 비로소 나는 만남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냥 자리에 가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자리만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설레발과 오지랖을 떨어가며 뒷담화 1순위에 오르는 것도 아닌, '적절한' 균형감을 익히는 것이다. 그것은 꼭 내가 주도적으로 말을 할 때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잘 듣고 되짚어 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 자리는 공감 가득한 자리이자 다시금 나누고 싶은 시간을 갖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 이런게 나이 듦의 미학인가 싶다.




어쩌다 만나는 정도를 넘어 열흘 동안 거의 매일이다 시피 열심을 내며 만나며 생각을 나누고 나니, 제일 사랑하며 암송하는 시 중 하나인 정현종 작가의 <방문객>이 나지막이 타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혼자만의 느낌과 생각이지만, 정 작가님의 제목은 의도적으로 아쉬움을 많이 남기게 한 것 같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는 그 만남에 그처럼 애간장 녹여가며 환대를 베풀어 주고자 하는 분이, 그 대상을 겨우 '방문객' 정도만으로 표현할 리가 있겠는가. 이 정도의 마음을 받는다면, 단순한 방문객 조차도 환대 속에 나와 관포지교를 맺을 정도로 마음을 열어 평생의 벗으로 삼지 않을까.


그런 만남에는 기다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기다림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바람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더듬어 보기라도 해야 그 사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겠는가. 오랜 해외 생활 속에 친구 찾기가 어렵다며 투정 부리던 내게, 시인은 그 한 번의 만남에 얼마나 마음을 다했는지, 어떤 자세로 맞이했는지, 그의 연약한 마음을 얼마나 깊이 보았는지 물어보고 있다. 좋은 사람을 찾으려 하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환대를 베풀어 네가 그 좋은 사람이 되라며 바람 빌려 전한다.


나는 마음을 열어 주려면 햇살이 되어 비춰줘야만 되는 줄로 알았다. 따사롭게 내리쬐어주는 것만이 능사인 줄 알았다. 시인은 다르다. 그는 바람을 응원한다. 바람으로도 능히 마음을 열어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자 신선한 관점인가.


자칫 부서질 수도 있는 마음을 보듬으려면 바람은 얼마나 미풍이 되어 불어야 하는 것일까. 강풍을 내고 싶어도 상대를 보아 배려의 차원으로 약풍으로 불어 준다는 것은, 결국, 내가 얼마나 그를 신경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마음이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숨죽여 가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나란 존재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도로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임으로 상대에게 분명 환대가 될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 여전히 '그 사람이 그때 그래서', '저 사람이 그때 그렇게만 안 했어도' 라며 투정을 일삼던 모습들. 그런 변명과 이유로 방어벽을 하나 둘 쌓아가려 할 때, 시인의 바람은 강풍이 되어 모순으로 점철된 내 합리화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만남을 기다린다 하니 시인은 태풍이 되어 담을 먼저 부수라 한다. 동시에 상대에겐 산들바람이 되어 환대의 마음까지 갖추라 한다. 오늘도 기다림 속에 깎아내며 낮추는 훈련을 한다. 귀한 만남을 위해서다. 일생 전체를 끌고 오는 귀인, 당신을 만나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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