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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07. 2021

사소함을 사랑하는 스페인 사람

일상을 잔잔한 행복으로 채우다

일요일 늦은 오후 아이들 친구네 부부와 여유로운 부활절 휴일을 즐기고 있던 때였다. 

"우리 산책 갈까?"


친구네가 사는 마드리드 근교 마을단지는 아파트 없이 단독 주택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곳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그야말로 이웃 주민이다. 이곳엔 흔히 보는 까페도, 세탁소도, 식품점도 없다. 큼직하게 갖춰진 집들, 그리고 공동으로 이용하는 놀이터와 자그마한 다용도 운동장이 전부다. 길가다 사람들을 마주치면 익히 서로 아는 것처럼 인사부터 시작해 그간의 대소사를 그 자리에서 주고 받곤 한다. 


한량인 본인도 수다 떨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정말이지 스페인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종일 말해도 지치질 않는다. 얼마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지, 유럽사람들 사이에선 농담으로 스페인에선 불륜도 일어나기 힘들다고 할 정도다. 왜냐하면 불륜을 저지르려면 일단 둘이서 만나야만 성립 하는데, 약속 장소로 나오기까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서로 지나는 길에 아는 사람마다 볼 때마다 붙잡고 말을 하다 보니, 애당초 약속 시간을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그럼 스페인 사람들은 정말 순수하게 가정을 지키며 사는가 봐요.' 라고 오해하진 마시길.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라, 이혼과 재혼, 연인, 삼각관계 등등 온갖 연애 케이스가 일어나는 곳이다. 심지어 회사원이었던 당시 당사자와 전화 연결이 안 되면, 전 부인, 전 애인, 현 애인 이렇게 돌려가며 전화를 다 해서 찾아낼 정도였다. 


가이드로 일하던 당시엔 버스 기사 조차 운전 하면서 계속 블루투스 마이크로 동료 기사며 연인에게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수다를 떠는터라, 오죽하면 인솔자나 가이드가 별 말없이 과묵한 기사 나올 때를 운전 잘 하는 기사보다 더 좋아한다는 말 마저 하겠는가.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다. 길 모르는 기사 나오면 대환장 파티다) 휴게소에 도착한다고 해서 전화를 끊는게 아니라, 담배까지 펴가며 수다를 끊지 않는 걸 보면, 역시나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구나 라는 걸 실감한다. 어쩌면 나도 일할 때만큼 말을 못 해서 이렇게 글로 대신 수다를 떠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책가자는 말에 친구네 아이들은 인라인으로 갈아신고, 공을 챙기고 나오고, 우리 아이들은 마스크만 간단히 쓰고 나왔다. 자주 놀러오는 집이지만, 마을 단지를 길게 거닐어 보는 건 처음이라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왔다. 겨울이라면 이미 어스름 해가 져야 하지만, 써머타임 시행 후 밤 9시까지도 환한 터라, 우리는 대낮보다 더 밝은 길을 걸으며 스페인의 더없이 쾌적한 봄날씨를 만끽했다.


돌바닥의 인도를 어느 정도 지나자 자작나무, 소나무, 향나무 등이 있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가다가 스페인 친구는 잘린 나무가지를 하나 줍는다. 주택이라 거실에 벽난로가 있어 장작나무로 불을 때곤 하는데, 이렇게 오솔길을 걷다 쓸만한 나무들이 있으면 하나 둘 집어 들어 쓰는 것이다. 흙바닥에는 송충이가 열을 지어 가기도 하고, 오솔길을 끼고 있는 이웃집에선 짚으로 둘러친 담벼락을 손보며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어딘가에서 팔랑팔랑 진갈색의 나비가 날아오니 막내 딸랑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비에게도 '올라~' 하며 인사를 건낸다. 


스페인 역사와 지리에 대한 얘기가 스페인인 친구와 주로 나누는 대화 소재인데, 말할 때마다 문법과 어휘에서 긴가민가 하며 실수할 때마다 고맙게도 민망해 하지 않고 바로 잡아 준다. 그 날 역시 걸으며 아이들 자녀 얘기에서 시작해 스페인 역사며 왕들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로 글타래를 엮어갔다. 


아직 몇 분만의 얘기로 국한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스페인 사람들과의 나눔에 뼈가 없어서 좋다. 감정을 콕콕 찌르며 자극하는 말도, 빈정대며 심기를 건드리는 말도 없다. 의외로 담백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담백함이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난 원래 이러지 않았다. 언중유골을 이상하리만치 신봉해서 매사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유식하고 지적인 줄 알고 착각하던 허영쟁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었을까. 나이듦과 함께 인내심 좋은 분들 덕에 느리지만 조금씩 그 힘을 빼가는 중이다.


그런 말을 나누다 문득 깨닫는 건, 말의 주제나 내용 보다 누구와 말을 하느냐 자체가 기분과 그 날의 기억을 결정짓는 가장 큰 뼈대가 된다는 점이었다. 마치 밥을 먹을 때처럼 말이다. 음식 맛도 물론 중요하지만, 맛이 좀 덜해도 좋은 사람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면, 식사 자체보다 분위기를 타고 인상을 더 깊게 받아서, 자세한 내용은 기억 못해도 무언가 분명 좋았다는 느낌으로 아름답게 마무리 짓던 장면이 떠오른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자연히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데, 그런 걸 건드리지 않고서도 충분히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편안하게 해 주는 벗이 있다는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나눔이 여지껏 영원한 이방인이라 느끼는 와중에도 '아니야, 그래도 살만한 곳이야.' 라며 좋은 걸 보다 많이 보고 순간순간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게 오솔길이 끝나는 길에 보니 작은 다용도 운동장이 나왔다. 안에서는 어느 스페인 가정이 나와 아빠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친구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아이들이 이곳에 놀러 나와 있으면, 저녁 먹으러 부르러 갈 때 와서 보던 곳인데, 그 날 따라 눈에 유난히 들어온게 있었다. 철망 위에 있는 작디 작은 명패. (저 위에 있는 제목의 배경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POLIDEPORTIVO DOMINGO BÁRCENAS
도밍고 바르세나스 스포츠 센터


아니, 이렇게나 작은 곳에까지 뭐하러 굳이 이름을 붙이나. 어차피 그냥 축구장, 운동장, 이렇게 불려지고 말 것을.과연 그러고 말 일일까? 도밍고 바르세나스, 누군인가 찾아보니, 스페인 살라망카 출신의 농구선수이자 핸드볼 선수로 2000년에 향년 72세로 타계하신 분이였다. 단지내 길 이름들은 스페인의 가수 이름으로 되어 있더니, 운동장에는 농구선수를 기념해 놓았다. 


그냥 잊혀졌을 수도 있을 이름이, 동네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지구 반대편 이방인의 눈에도 들어와 이렇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까지 소개하는 자리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 아닌가. 다만, 스페인 친구에게 이런 이름이 붙은 줄 아냐고 물어보니, '엇, 그래? 난 살면서 처음 봤어.' 하는 반응에 서로 빵 터지고 말았지만.


대단치 않게 그저 한바퀴 휘 돌아보는 산책길은 사소한 생활의 한 단면이자 소소한 일상 그 자체이다. 그 평범한 시간에서 사랑도 특별할 것 없이 아주 평범하게 자리 잡는다. 건강한 아이들은 바르세나스의 운동장에서 뛰고, 차고, 달렸다. 하늘은 여전히 밝았고, 아이들의 아빠는 낯선 사람의 이름 앞에서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검은지빠귀 한 마리가 그 이방인 앞에서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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