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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15. 2021

희생과 행복 사이

자오 츠판 <하류 사회>

희생은 행복과 다릅니다.
그러나 용감하게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곧 행복의 근원이 됩니다.
 
-<하류 사회>, 자오 츠판


Q. 누군가의 희생이 본인에게 행복이 된 경험이 있나요.

A. 글쎄요, 누군가의 수고나 희생이 저에게 감사의 제목이자 마음의 빚으로 남기는 해요. 그렇지만 그걸로 행복까지 이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문장의 글에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물론, 저는 '용감하게' 희생하는 걸 목격하지 못해서 (기사나 소설, 영화로는 접하지만,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저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행복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왜냐하면 '희생'이라는 단어가 전하는 힘이 워낙에 숭고하고 무거워서, 제가 '행복하다' 라는 감정에 도달하기도 전에 일단 미안한 마음부터가 들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게 자꾸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아 발목을 잡아요. 때론 그런 감정이 심하면 죄책감 마저 갖게 되고요.


누군가의 희생이 저에게 행복으로까지 되려면, 일반인들은 통상 '희생'으로 본다 할지언정, 그걸 행하는 당사자는 '기쁨이 있는 자발적 수고' 정도의 선에서 그쳐야 할 거 같습니다. 제일 흔한 사례가 <부모님의 희생>이겠지요. 부모님의 희생 덕에 지금의 제가 있고, 저 또한 자식을 둔 부모가 되어 희생을 치루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겠죠?


이게 일반적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맞아요. 분명 희생이에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달리 보고 싶습니다. 그건 다만 제가 선택한 길이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일 뿐인 것으로요. 저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를 둔 아버지 입니다. 때로는 껄껄 웃다가, 한숨 내쉬고, 때로는 욱하는 마음에 큰소리도 냈다가, 다시 아이들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토닥여 주고, 말없이 그저 가슴으로 안아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착한 아빠와 무서운 아버지의 가면을 쓰곤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무한 친절했다 한없이 불친절해지고, 엄청 게을렀다가 끝도 없이 성실해 지고, 너무도 무심했다가 이렇게까지 세심하고 자상할 줄이야 하는 오만 가지의 다양한 군상도 같이 묶여 있습니다. 저도 제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사십 넘고서도 여전히 고민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니, 아이들도 이런 아빠를 보며 헷갈리겠다 싶어요.


분명한 건, 아이들은 제가 원해서 아내와 같이 낳고 키운 것이지, 제가 원하지도 않는데,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잖아요. 심지어 어른이자 부모인 저는 선택권이라도 있지만, 아이들은 눈을 뜬 순간부터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며 일방적으로 내몰리게 되지 않던가요.




제가 가정을 위해 일하고,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을 사오고, 아이들을 위해 어딘가로 휴가를 떠나는 건 있지만, 그게 100% 제가 아닌 가족 구성원만을 위한 행위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좀 솔직해져 볼까요.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저를 위해서도 씁니다. 제가 좋아하는 먹거리 사오고, 제가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휴가지를 선정합니다. 그렇게 살던 중에 애들이 좋아서 활짝 웃으면 저에겐 그 보다 더 큰 기쁨이 없어요.


누군가 저에게 "그래 그렇게 고생해서 얻는다는게 고작, 활짝 웃는 미소 한 번 보고, 깔깔대는 웃음 한 번 들으려고 이 고생을 하는 거니?" 라고 묻는다면, 저는 몇 번이고 "아이고, 그걸 말이라고 하니?" 라고 되물어 볼 겁니다. 네, 저는 책이나 영화 속 남의 얘기가 아니라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니까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경험을 물릴 수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이들의 행복이 아이들의 행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그 행복을 위해 저를 '희생'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희생이라는 개념은 분명 거룩하고 위대하며 아름다운 것이지만, 저는 일상에서 되도록이면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이기적일 정도로요. 이유는 좀 더 가벼워 지고 싶어서 입니다. 안 그래도 힘들고 어려운 세상인데 더 큰 마음의 짐을 저 스스로에게 안기고 싶지 않거든요.


무엇보다도 제가 희생의 프레임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일전에 몇 번이고 경험한 적이 있어요. 비교의 굴레에 저를 얽어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숭고했던 희생은 어느새 빛을 잃고, 누가누가 잘했나 하는 유치한 도토리 키재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내가 애를 쓴만큼, 애를 쓰지 않은 남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이 가게 되고요. 반대로, 제가 남들만큼 뭔가 수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 되면, 그 때는 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게 됩니다.


이른바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하는, '비교'의 선상에 올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저울질 하며 흑백논리로 자신을 무장하고 세상을 너무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다양성이 안겨다 준 풍성한 유산은 자취를 감추고 뭐든 획일적인 사고를 가진 꼰대이자 괴물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저 자신을 남과 비교해 가며, 나는 이만큼 희생했는데, 쟤는 왜 저 정도 밖에 안 해? 라든지, 나도 쟤랑 똑같이 희생했는데 왜 나한텐 돌아오는 게 이거 밖에 없어? 라고 하는거요. 차마 창피해서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지만, 뫼비우스의 띠마냥 본인 머릿 속에서 무한 루프를 돌며, 더 발전하지도 못하고 고착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틀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제 관점을 바꾸는 겁니다. 제가 하는 행위 자체를 목표를 위한 수단이기 전에 목적 자체로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현재 진행중인 이 과정 progress 조차 즐거움을 발견하는 눈을 갖게 되고, 억지에서 훈련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어요. 군대에서 훈련 받을 때 제일 많이 듣던 말 중 하나가  x고생 이라 생각하지 말고 체육관에서 비싼 돈 주고 받는 트레이닝으로 여기라는 거였거든요.


그래요. 밖에서는 한 달이든 분기든 일 년이든, 돈 내고 헬스장 이용권 끊어서, 달리고 푸쉬업 하고, 무거운 역기 들어 올리고 할텐데, 군대에선 매일 규칙적으로 시켜 주잖아요. 돈을 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받죠. 똑같이 팔굽혀 펴기를 해도 누구는 벌 받는 걸로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몸을 키우기 위해, 건강을 지키기 위한 과정으로 보아요. 아, 물론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그런 관점의 차이를 바꾸는 연습을 자주 하다보니, 지금 내가 하는 것이 희생이라기 보다 무언가를 이루어 가기 위해 당연히 치뤄야 할 과정 중 하나로 보게 됩니다. 거기에 '열정'마저 붙으면, 일 자체를 즐기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 되겠고요. 저요? 여전히 연습 중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의 수고를 '희생'으로까지 인플레이션 시키고 싶진 않아요. 저도 가족에게도 서로가 불편하고 찜찜하고 그늘지게 만드는 일이 되는 것 같아서요. 이미 드라마와 영화에서 충분히 봐오지 않았던가요. 더군다나 그건 가상의 세계에서만 그럴듯 하게 가공된 얘기가 아니지요. 육아 프로그램에서도 늘 강조하는 사항은, 그리고 이론이 아닌 경험에서 보여지는 증명은, 부모가 먼저 행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식들 또한 행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뒤집어 말해, 부모가 행복하면 자식들도 행복해 집니다.


저도 그 사례에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아웅다웅 하는 세 아이들을 보며 실감합니다. 아빠인 저와 엄마인 아내가 먼저 삶에서 만족하고 행복하면 아이들이 치고박고 하는 중에도 선을 넘지 않습니다. 잠깐 엇나간다 하더라도 이내 돌아옵니다. 해서 저는 저의 행위를 '수고' 정도로는 쳐 주지만, '희생' 이라고까지 격상시키고 싶진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격상시킬 정도로 대단한 것도 없었고요.


희생은 감사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행복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일상에서 둘러본 저의 생각입니다. 시대가 일제 강점기 하에 독립 운동을 치루어 내거나, 전쟁이 발발하던 때라면 지금의 얘기는 처음부터 완전 수정이 되어야겠지요. 실제로 희생을 통해 행복을 이루신 분들도 계실겁니다. 저로서는 감히 넘나 볼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른 그 분들께,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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