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가 보는 나의 선택과 인생의 가치
인생에 선험적 의미란 없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신이고
당신이 선택한 의미가 곧 인생의 가치다
-장 폴 사르트르
Q. 지나간 일에 의미를 부여해 보아요.
A.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것은 비단 글만이 아니라 사진, 그림, 영상 등 '기록'으로 남기는 모든 행위에 적용이 된다. 그런 행위들은, 궁극에 가서는 잊혀질 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들어간 제 2의 자아를 어떻게든 남겨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명예욕이 어쩌면 이 기록의 행위와 관련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시적인 결과로 남겨지는 기록 이외에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남기는 또 하나의 행위는 불가시적인 것이 있는데, 이는 '의미 부여'라는 사유로 다루어진다. '의미 부여'는 머릿 속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정신 세계의 놀이, 즉 사유가 되는데, 이를 밖으로 표출하면 기록이 되고, 안에서만 간직하면 본인만의 추억이 되어, 고스란히 저장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의미 부여를 현대적으로 약간 희화화 또는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흔히 말하는 '정신승리'일 것이다. 정신승리라는 건 기실, 그 비꼼조의 어감에서 느껴지듯, 실상과는 정 반대의 일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마주하는 현실을 부정하려한다. 또는, 비록 사유의 세계에서 또는 싸이버 공간 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보다 적극성을 띄어, 현재의 상태를 정복하고 마침내 목표나 목적을 달성함으로 얻어내는 성취감을 보이고 싶어한다. 왜 그럴까.
내가 현실을 뛰어넘을 능력이 현재로선 태부족이다. 평범함을 뛰어넘는 무언가 강려크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몇 년이 흘러도 계속 같은 상태에 있으리란 것이 빤히 예측되거나, 넘사벽의 현실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노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극복하고 싶으나 이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이들이 쉽게 빠져들어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중독이다. 중독은 꼭 술, 마약, 섹스, 인터넷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되건 기승전 무엇으로 끝난다면 중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다양한 사고를 펼쳐 보지 못하고 하나의 틀에만 귀결 되기 때문에, 편협해지고 불통이 되고 만다. 점, 선, 면을 넘어 입체와 초입체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1차원적 선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의미 부여는 이런 때 고착화된 시각을 깨주는 좋은 에너지가 된다.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 자체에만 집착해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잘게 쪼개거나, 큰 그림 중의 일부로 보면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생각을 보다 명료하게 만들어 준다. 또는 내가 하는 일에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덧입혀 줌으로, 슬럼프에 빠지거나 권태를 느끼고 있을 때, 이를 벗어 던지고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도 있다. 특히, 좋은 일 보다 그렇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의미 부여는 외부의 자극 없이도 이겨낼 건강한 정신적 사고의 행위가 된다.
스페인에 왔던 첫 해는 내 인생의 암흑기였고, 흑역사였다. 중세 유럽처럼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신에게만 귀착되어서가 아니라, 그 전까지 팔팔하게 살아 숨쉬던 모든 감정과 사유가 오로지 업무의 Push & Pressed 로 축약되어 극도의 Stress 와 Trauma 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상사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머릿 속이 새하얘지며, 언어 조차 제대로 표현이 안 되는 시기였다. 그 전까지 워낙 온실 속 화초로 자랐기에 제대로 야생에서 뿌리를 내려 '남들처럼' 살려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며 의미부여를 해 보았다. 아마 살면서 처음 가져본 의미부여의 시도였을 것이다.
처절한 실패였다. 도공이 결점 있는 도기를 바라볼 때, 그 전까지 쏟았던 시간이며 노력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깨버리듯, 그렇게 처절하게 박살이 나고 깨지고 말았다. 이전에 수상이나 인정을 통해 받은 자신감은 신기루가 되듯 일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재기의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때부터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 전에는 어떤 일을 시작하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통과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늦게나마 도전을 배웠다. 도전하면 성공할 수도 있지만, 당연 실패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실패하지만, 그 실패 자체가 실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터득했다. 저질러 봐서 잘 된 거면 성공이고, 아니면 경험이 된다는 남들의 말이 비로소 온전히 내 것으로 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은 아니다. 아니, 애당초 될 수도 없다. 여전히 유리멘탈일 때도 있다. 세상 찬 바람에 마냥 꿋꿋하게 버티거나 무조건적으로 일어서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 험한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보고, 비로소 타인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되면서 깨달은 바는 단순한 정신 승리를 넘어선다. 단순히 이기고 지는 제로섬도, 치킨 게임도 아니었다. 그건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네가 있고, 그가 있고, 당신이 있고, 그들이 있어, 내가 존재한다. 나를 넘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달아 다행이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