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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May 04. 2021

슬프면 울고 말하고 글을 씁니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어쨌든 이 슬픔 때문에 난 바보가 됐어.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And sadness make such a want-wit out of me, 

that I have much ado to know myself


-<The Merchant of Venice> William Shakespeare




Q.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

A. 슬픔이 너무 크다면 그때는 참지 않고 눈물을 흘립니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고요? 우리나라에서만 통하는, 아니, 통했던 라떼 시절의 얘기입니다. 더는 감정을 거슬러 억지로 참지 누르지 않는 것이 대세입니다. 이렇게까지 과격한 문장을 써야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의 감정이란, 다 그 사람에게 그때 그 상황에선 없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일어나야만 하는, 또는 자연스레 일어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알고만 있어도 우리는 한결 편안하게 내 마음의 감정을 수용하고, 다시 평정심을 되찾아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과하게 들떠만 있어도 문제지만, 맷돌 매단 듯 한없이 침잠해 가는 것만도 건강한 일은 아니겠지요. 어떤 감정이든 좋거나 나쁜 것은 없고, 다만 내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등이라 생각합니다. 기쁠 때 정말 기분 좋다며 에너지를 발산하듯, 슬플 때는 제대로 슬퍼하고 다듬을 줄 알아야 해요. 


슬픈 일인데 분노만 내고, 짜증 나는 일에 화만 낸다면, 감정의 수도꼭지가 잘못 틀어져 있는 것이겠지요. 한편, 소모적인 감정을 막겠다며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아요. 우리가 죽어있거나 목석이 아닌 이상, 신체는 항상 움직이듯,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땅과 하늘을 오가며 살아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때 당시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수용하면서, 본인의 상태를 글로든 말로든 표현하고 해소해 보세요. 충분히 건강한 감정 속에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걸 알아차리게 될 겁니다.




오늘의 주제가 슬픔이니만큼, 슬픔에 대해 제가 수용하고 풀어가는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저는 슬프면 일단 웁니다. 오열은 아니고요.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차 오르는 정도가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어요. 올라오는 감정을 부러 부인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이란 존재가, 기쁨보다는 슬픔을 보다 일상에서 민감하게 느끼기에 가능한 일일 거라 생각해요. 그렇다고 긍정보다 부정에 우선하는 존재로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에 쉽게 반응한다는 건, 비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함이 아니라, 주변에 슬프거나 우울에 빠진 사람을 얼른 알아차리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장점이자 장치일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삶은 진작에 끝을 보고 일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요. 눈물과 함께 감정이 흐르고 나면 응어리는 풀리고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습니다. 


그다음에는 얘기를 나눠 봅니다. 얘기를 나누는 수단은 전에는 보통 말이었지만, 요즘 와서는 글의 덕을 좀 더 봅니다. (그렇다고 제 상황이 맨날 슬프고, 어렵고 비참하고, 애통해요 이런 건 아니고요, 하다 보니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일단, 울음의 감정 속에 상당 부분 해소된 상태라, 감정에 재 몰입하지 않으려 합니다. 말을 하면, 말에 감정을 옮겨내는 덕에, 제 기분이 한결 더 풀어져요. 거기에 듣는 이의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 또는 보다 적극적인 리액션이 더해진다면, 힘들었던 그 슬픔의 동굴에서 드디어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적극적인 리액션이라 함은, 제가 한 말을 한 번 더 따라 읊어주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말을 따라 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고 여겨 고마움을 느낍니다. 더불어 저만의 감정에서 벗어나 상대방에 대한 생각으로 전환하는 기회를 얻기도 해요. 지독했던 슬픔에서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감정은 이미 옅어졌습니다. 진한 차를 한 번 우려낸 후 다시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 맛이 덜해지는 것처럼요. 어느새 일상은 계절의 변화 앞에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감정의 가지 끝에 매달리던 슬픔은 낙엽이 되어 툭 떨어지고 맙니다.




나이가 드니 개인적인 일보다 뉴스의 사건 사고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특히나 어린 생명이나 학생,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면, 직접적인 경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키우는 입장에서 거의 동일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듭니다. 내 일이 아님에도 마음이 베이는 아릿함과 써릿함이 있습니다. 


이제는 글을 쓸 타이밍입니다. 전에는 필터링되지 않은 단어들로 저의 뾰족한 마음이며 날카로운 감정을 드러내곤 했지요. 그런데 그 마저도 이제는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아니, 무디어졌다기보다는 잠시 묵히고 나오는 곰삭은 표현일 거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뚫린 입이라는 거칠고 상스런 말의 다이렉트 메시지가 아니라, 손 끝 타이핑을 통해 전달되는 활자와 그걸 다시 읽어내는 눈,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걸 다시 반복적으로 되새겨 보는 작업 등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에, 몇 번의 정제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좀 더 신사적으로 되새겨 보고, 그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까지 나가는 경험을 합니다. 


때때론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친구란 단지 동갑내기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도 초월합니다. 나이와 성별, 나라를 떠나 무시로 떠오르는, 언제든 보고 싶은, 생각만으로도 마음 곁에 따스하면서도 아릿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편지란 아무래도 손편지보다는 문자가 되겠지요. 문장을 한 번에 퇴고 없이, 생각나는 대로 줄줄이 적어 봅니다. 꼭 길어야 되는 건 아니고요. 짧은 문장으로 몇 번에 나눠도 좋습니다. 그렇게 글로써 풀어가다 보면, 글이 가진 힘이 눈에 안 보임에도 얼마나 큰 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달된 편지는 그 친구의 마음에서 또 하나의 글을 남기게 합니다. 편지이기에 그 즉시로 답장을 요하지 않습니다. 실은, 오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장문의 편지를 썼다고 해서 그에게 그만큼의 분량을 요구할 권리도, 그가 그렇게 답장을 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낸 입장에선 그 친구를 떠올리며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무엇보다 그런 글을 읽을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을 얻으니까요.




슬프신가요. 참지 마시고 흘려보내세요.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상당 부분 해소가 됩니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니, 혼자서만 삭히지 마세요.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내 속마음을 보이지는 말고요. 마음을 알아줄 친구, 그 또는 그녀에게 잠깐 시간 내 달라하고 전해 보세요. 진심을 아는 사이니 들어줄 겁니다. 나중에는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잖아요. 


시간이 안 맞는다면 (저처럼 해외에선 시간대가 달라 통화가 쉽지 않아요, 사실) 편지를 써 보세요. 안부 전하며 자기의 근황도 얘기하고, 두서없이 적어보는 거예요. 손편지면야 금상첨화지만, 긴 문자도, 몇 줄의 문자도 충분해요. 그렇게 오랜만에 친구와 얘기도 나눠보고, 서로 몰랐던 사정도 알고, 마음 다독여 줄 수 있고, 격려와 응원을 서로 전할 수 있으니, 그리고 글은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으니, 써 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글쓰기는 혼자만의 즐거움도 되지만, 읽고 나눌 친구가 있다는 건 더 큰 즐거움을 가져옵니다. 그냥 친구를 넘어 문우文友, 글로 사귄 벗이 되는 것이지요. 브런치와 소셜 미디어에는 숨겨진 문우가 참 많습니다. 구독자와 팔로워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런 기회가 있음에,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스페인의 밤입니다. Gracias.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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