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심지어 너무 좋은데요? - 헨리 데이빗 소로
전에는 듣지 못하던 귀와 보지 못하던 눈이
이제는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한다.
세월을 살던 내가 순간을 살고
배운 말만 알던 내가
이제는 진리를 안다.
-<영감> 헨레 데이비드 소로
I hearing get, who had but ears,
And sight, who had but eyes before,
I moments live, who lived but years,
And truth discern, who knew but learning's lore.
-<Inspiration> Henry David Thoreau
Q. 나이 들며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A. 나이 드니 비로소 겸손이 무언지를 배웁니다. 전에는 머리로만 알았던 게 이제는 가슴으로 전해 내려 옵니다. 책으로만 알았던 지식이 경험 속에 지혜로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배운 가장 큰 지혜,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가 어떤 일이 생기든 고갤 끄덕거리며 이해하려는 폭이 넓어졌다는 점입니다.
저는 참 옹졸했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딴에는 넓혔다고 생각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면 밀대로 넓힌 반죽이 아니라 반죽의 찢어진 틈 정도 밖에 되지 않는거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제가 쌓은 업보이고, 그렇다고 꼭 그들의 판단이 맞다고만 할 수도 없잖아요. 살다보면 그럴 수 있죠 뭐.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줄여서 '그럴 수 있지' 는 일종의 인터넷 밈 meme (대개 모방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따위) 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어디다 갖다 붙혀도 전부 통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A. 소식 들었어? 걔네 둘 사귀는거 맞대.
B. 그래? 그럴 수 있지.
물론, 반대도 됩니다.
A. 소식 들었어? 걔네 둘 결국엔 깨졌대.
B. 그래? 그럴 수 있지.
이 정도면 거의 군 의무실의 전설, 빨간약에 해당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남의 일에 한풀 너그럽게 대하는 '그럴 수 있지'는 본인의 일상에도 유용하게 적용됩니다. 일을 성공 시키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려 왔지만 결국엔 뜻대로 이루지 못했을 때에도,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오던 프로젝트를 한순간의 그것도 내 손 끝 하나의 실수로 망쳤을 때도, 글을 한창 줄기차게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의 샘이 마르듯 글이 신통찮게 안 써질 때도,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는 마음의 분노를 덜어주고, 몰입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게 만들어 주고, 가슴 내리칠 상황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관조적인 자세마저 갖게 합니다.
혹자는 이런 생각이 만연하면 너무 늘어지는 것이 아니냐 라고 걱정할 수도 있지만, 심리학에서는 이런 너그러운 태도를 연구한 결과, 의연함을 가지고 상대를 도와주려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내 마음이 너그러워지니 사람이 모이고, 친구가 생기며, 삶의 면면이 한층 풍성해 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저는 한 때 지나치게 고집을 내세웠습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나는 언제나 맞으며, 맞는 행동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장난끼 가득한 또래와 어울리기를 힘들어 했습니다. 법 없이 살 사람이기도 했지만, 벗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세상을 까마귀와 백로로 나누어 근묵자흑과 근주자적을 표어로 삼다시피 한 탓에, 표면적 지식으로만 알고, 지혜를 갖추지 못해, 내게 가까이 오는 사람도 드물었고, 가까이 오려는 사람에게 조차 쌀쌀맞게 대하고 말았습니다.
잘난 것도 없이 목만 곧았던 것이지요. 그 뿐인가요. 사는 재미가 없었어요. 시대의 풍조에 아랑곳 않는 선비의 기질을 딱히 나쁘다 할 순 없었지만, 사사건건 대쪽 같은 자세로 경직되어 있으니, 두루 사람을 사귀기가 어려웠고, 누군가에게 첫 인상을 좋게 주기란 그냥 접고 사는 편이 마음 편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제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아닐려나? 15년의 해외 생활 탓일 수도 있겠으나,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 중에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연락되는 친구가 없으니, 내가 과거에 어떤 녀석이었고, 어떤 성깔을 지닌 애였는지 성찰해 보기가 좀 어렵네요. 다만, 그 당시 어머니께서 늘 힘주어 말씀하시던 게 있었어요 : 남한테는 관대하고, 너에게는 엄격해라.
말이야 눈 감고도 깜지를 만들만큼 쉽지만, 그렇다고 행동이 바뀔리가요. 결국 오랜 시간에 걸쳐 저의 성격이나 행동이 바뀐 건, 지금 쓰면서 떠오른 거지만, 헌신적인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주위의 좋은 친구들 영향이 큽니다. 처음에 퍼올린 건 시커먼 먹물이었지만 위로부터 계속 맑은 물을 부은 결과 오염된 물 또한 종국에 가서는 맑은 물이 된 것처럼. 근묵자흑, 근주자적을 구호처럼 외쳐대며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옹졸하고 편협했던 나를 어떻게든 품어주고 따뜻하게 대해준 주위 사람들의 선한 영향력이 저를 바꾸었습니다.
또한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학업 성적으로 잘난 줄 알았다가, 특목고 시절, 그야말로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의 생활은 제 한계를 극명하게 볼 수 있던 때였어요. 이후 대학과 카투사 군시절, 그리고 해외로 나오면서 비로소 눈 뜨기 시작한 제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를 제대로 깨우칠 수 있었어요.
특히나 제 삶에 있어서 문화 가이드로 일하던 시절은 정말 세상 자체를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지요. 우리나라에서 오는 각계각층의 인물들, 코흘리개 아이서부터 고령의 어르신까지, 저마다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가진 인생이 다가오니,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바가 제가 가진 편견을 깨게 되었고요.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엄청난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 곳곳을 다니며 현지인들과 주고 받는 얘기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양하며, 넓은 세상이 존재하는지, 그 안에서 저 자신을 새로이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배움 중에 있고, 실천 하며 하나씩 뜯어 고칩니다. 아내하고 평소 잘 지내다가도 공연히 별 생각도 없이 기분 나쁠 말을 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곤 합니다. 아이들에게 영화에서 볼 법한 자상한 아빠, 인자한 아빠, 그러면서도 실력도 있는 아빠가 되겠다며 다짐하지만, 밤만 되면 제 시간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당장에 언성이 올라가고 말투가 험악해 지는 쪼잔한 아빠가 되곤 합니다. 불혹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팔랑귀에 하루에도 몇 번씩 변심을 하고마는 한심한 아재이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저 자신을 인정합니다: 난 완벽하지 않다. 완벽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런 일도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구나.
그렇게 저는 나이 들어 한량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큰소리 탕탕 치고 뒤로는 허당으로 자빠지며, 구멍도 숭숭 뚫려서 실수 투성인데다, 뭘해도 왜이리 어설퍼 보이는 것인지, 하지만 딱히 밉지 않은 한량, 눈 밖에 나지 않는 선비, 나름 매력을 갖춘 세 아이의 아빠, 아니, 이런저런 수식어 다 떼고요, 그저 괜찮은 사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다 인생 정말 잘 살았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이 드니 주위에 얼마나 대단하고 멋지며 존경스러운 분들이 가득한지도 눈에 들어왔어요. 이제야 인간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모자란 줄 깨닫고 고개 숙이니 주위 분들이 손을 뻗어 벗이 되어 주십니다. 덕분에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만남이 더욱 즐거워졌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이쯤에서 처음에 소개한 소로의 시, 영감의 일부를 다시 읽어 봅니다.
전에는 듣지 못하던 귀와 보지 못하던 눈이
이제는 들리기도 하고 보이기도 한다.
세월을 살던 내가 순간을 살고
배운 말만 알던 내가
이제는 진리를 안다.
시인인 그는 듣고 보던 것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했고요. 진리를 알게 되었다 했습니다. 저는 무엇을 듣고, 보고, 알고 있는 것일까요. 자연에 기거하며 배운 소로의 철학이 저에겐 자연 보다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겸손함에서 배어 나와 너그러움의 태도로 자신과 타인에게 '그럴 수 있지' 하며 허용하는 자세, 한결 여유있음에 무거웠던 삶이 조금은 더 가벼워짐은, 단지 나 혼자서 얻은 정신승리의 보상이 아닐 것입니다. 곁에서 서로 도움의 손길되어 기꺼이 돕고, 감사히 도움 받으며 사는 이를 두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이를 저는 친구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