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1년 반이 채 안 되어 나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 이래 그 친구를 만나질 못했다. 비단 그 친구 뿐인가. 초, 중, 고, 대학교, 교회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 본전도 못 찾을 핑계를 대자면, 슬로바키아든 스페인에서든 일하는 동안에는 휴가기간이 가족만 만나고 돌아가기에도 턱없이 짧았다. 스페인에 사는 9년의 시간 동안 한국에 다녀와 본 건 딱 두 번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메신저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연락을 하면서도, 막상 한국에 가면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시간 없음이 나만 그럴까. 세계에서 가장 바쁜 나라인 한국의 직장인으로 몸담고 있는 친구들은 더하면 더했다. 그리고 나도 그렇지만 그 친구들도 가족이 생겼고,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그런 와중에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고 짜내어 단 두 시간이라도 만나준 친구들에겐 한없이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다.
친구들 중엔 내가 외국에, 그것도 유럽에 산다며 부러워 하고 막연한 동경심을 갖는 경우도 있었지만, 정작 살고 있는 나는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향수병에 시차 때문에 걸어도 못 받을 애먼 전화기만 들었다 놨다 했다. 그나마 시차를 맞춰 전화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선 그 놈의 보이스 피싱 때문에 다들 모르는 번호는 차단 또는 수신거부가 되어 제대로 연결도 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중에 카톡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신세계가 열렸지만, 그래도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바쁘게 살고, 한창 중역에 올라 일에 몰입해 있을 친구들에게, 지구 반대편에서 한량이된 친구가 뜬금없는 전화로 별 이유도 없이, 그저 안부나 물어 보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해 봤다는 말은, 그들에겐 철딱서니 없는, 조금 순화해서 말하자면, 여전히 순수함을 간직한 소년 같은, 하지만 어찌보면 나잇값 못하는 녀석의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나중에 돌아 돌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물리적인 거리와 제한 속에 십 수년을 지내고 보니, 나는 생각하게 되기를, 어쩌면 정말,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그건 보통 때는 그저 가벼운 향수병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계절의 변화가 찾아오면 온도차로 며칠 감기 몸살을 앓듯, 부지불식간 심경에 변화가 찾아오면, 그건 곧 지독한 슬픔이자 고독이 되어 두려움 마저 느끼게 했다. 남자인데도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감정이 유난히 발달한 건지 모르겠다.
때론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는 친구들에 대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짙어지면, 나는 그 마음을 메신저를 편지 삼아 퇴고 없이 타라락 써내어 마음을 손가락 끝에 실어 보내곤 했다. 답장은 늦게 와도 상관 없고, 아예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문자가 아닌 편지를 보내는 것이니까. 백만년만에 왠 연락을? 축의금이라도 보내야 하는 일인건가? 하는 계산이 아니라, 그간 연락 못 줘서 미안하지만, 그렇게 너를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만이라도 친구가 알아주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전화로 연결되어 목소리를 들을 때면, 통화를 마친 시점부터 잠들기 전까지 그 날 하루는 내게 행복으로 꽉 채워진 날이 되었다.
그것은 가족에게서 받고 느끼는 사랑과는 또다른 감정의 화분이었다. 마치 내 감정의 밭은 처음부터 가족의 정원과 친구의 정원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서로는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가족의 뜰에선 가족의 사랑으로 정성껏 물을 주고, 볕을 쬐며, 바람도 쐬어가며 건강한 꽃들을 키워 향기 가득한 공원으로 키운다. 동일하게 친구의 정원 역시, 내 마음과 신경을 고루 쓰며 돌아보아, 곳곳에 아름드리 나무로까지 성장시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에는 열매를 거두어 두고두고 같이 나누고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그렇게 조금씩 내 생각과 감정, 마음을 담아 두서없이 써보는 편지는 어느새 소셜 미디어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이렇게 브런치에까지 올라와 부끄럽지만 타이핑을 치며 여전히 마음 한 켠에서 타오르는 그리움과 생각을 채우고, 흘려 보내어 비우고, 다시 생각의 텃밭으로 옮겨 부지런히 솎아주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브런치 덕에 어느새 친구들에게도 조금씩 브런치 작가라는 이미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별 말 없이 읽고 지나가든, 좋아요나 댓글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건 간에,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쓰는 사람 입장에서 나름의 보람과 만족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는 미안하게도 메시지를 주고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런 편지를 보낸 적은 없었다. 그저 페이스북에 올려진 정말 사소하기 그지 없는 내 일상의 편린이 담긴 사진과 함께 스크롤 몇 번이면 끝날 정도의 짧은 글들만을 읽고서, 간간히 댓글로 내 글이 재밌거나 아이들 사진이 좋다며 짧게 의견을 남겨준 게 전부였다. 그런 친구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내며 너무도 힘겨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따뜻한 위로가 받고 싶다 했다.
그 친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구구절절한 위로의 말이 아님을 안다. 이런 때는 말은 소용이 없다. 할 수만 있음 한달음에 달려가 곁에서 자리를 함께 하고, 어깨를 빌려주며, 같이 울고, 눈물 닦으라며 조용히 휴지를 내어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따뜻한 위로가 받고 싶다는 친구의 문자는 나를 계속 흔들었다. 평소 변변찮은 글에서 그나마 주던 따스함이 이런 상황에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아니, 앞 문장은 다시 다음과 같이 정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 미욱한 글이 그 친구에게 따스함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별 것 아닌 글에서 조차 따스함을 찾아 가져간 것이라고 봐야 옳다.
내가 지금까지 받은 부탁 중 제일 무거웠다. 제아무리 글이 잘 안 써진다 한들 그 때와 같은 때는 없었다. 너무 지나친가. 너무 부족한가. 오지랖인가. 수없는 자기검열 속에 단어며 문장길이며 썼다 지웠다를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지금 이 단락도 백 스페이스를 몇 번째 누르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부음 소식에 남들처럼 명복을 빕니다 라는 말로 대신하고 뒤로 숨고만 싶었다.
그럼에도 얼마나 정말 그 마음이 어려웠으면 그런 부탁을 다 했을까 싶었다. 내가 뭐라고. 내 글이 뭐라고. 따뜻한 위로라니. 당치도 않지만, 결국 그 친구에게 위로를 건내는 건 내 글이 아니라, 실상 그 친구의 심성 스스로가 캐어 가는 것임을 깨닫고 나니, 한결 부담이 덜해지고, 경직된 마음에는 훈풍이 불었다. 모두가 고요한 새벽에 친구에게 숙고 끝에 처음으로 짧은 편지를 썼다. 무슨 말을 쓴다 한들 경황없는 그 상황 속에서 눈에 읽힐까 만은 친구는 고맙다 했다.
What we have once enjoyed and deeply loved we can never lose. All that we love deeply becomes a part of us. -Helen Keller
우리가 한 때 즐기고 깊이 사랑한 것을 우리는 결코 잃을 수 없어요.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되니까요. -헬렌 켈러
그 때는 사용할 수 없었던 헬렌 켈러 여사의 문구를 인용하며 나의 삶에 가만 적용해 본다. 사랑을 쏟고, 함께 즐기며, 마음을 깊이 담았기에, 어느새 나의 일부를 넘어 전부가 된 가족, 그리고 친구, 그리고 글. 그 셋이 주는 위로 앞에 다시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