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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y 19. 2021

모든 전통은 깨질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나라나 민족에 전통이 있듯이 최소 집단인 가정에도 전통이 있다. 우리 스페인 가족의 전통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 만찬이었다.


그건 마치 한국의 제사와도 같았다. 시부모님의 집에서 치러지며 반드시 온 가족이 다 모여야 했고 음식도 정해져 있었다. 가장 먼저 사과와 호두를 섞은 샐러드를 먹고(소화에 좋단다) 와인과 함께 하몽과 로모, 새우 등을 먹고 있으면 콘소메가 도착한다.(이미 이 시점에서 배가 부르다) 이후 생선 요리가 등장하고(이쯤 되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소고기를 파테와 베이컨 등으로 감싼 뒤 또 파이지에 감싼 웰링턴 스테이크가 도착한다. 웰링턴 스테이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가족 구성원의 반이상이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있다. 음식이 서빙될 때면 서로 경쟁하듯 '난 조금만! 아앗 그만큼 못 먹어요 제일 작은 조각!'을 외치게 된다. 겨우겨우 그 음식까지 먹고 나면 스페인식 크리스마스 디저트인 뚜론과 초콜릿 등이 담긴 그릇이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25일이 생일인 가족의 생일 축하를 위해 밤 12시가 되면 케이크까지 등장한다.


시어머니의 정성은 감사하지만 나는 이 만찬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 있는지 늘 궁금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고생하시고 가족들은 다들 더는 못 먹는다고 난리 치며 끝나는 만찬이었다.


그런 만찬의 전통은 작년 코로나로 인해 깨졌다. 일단 집합 인원의 제한으로 모든 가족이 다 모이는 게 불가능했기에 두 명은 오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모여 앉지 않기 위해 테이블을 나누어 앉았다. 결정적으로 24일 저녁이 아닌 25일 점심으로 대체되었다. 음식도 더불어 상당히 간소해졌다. 모임 시간을 최소화하자는 방침이었다. 결국 모였으니 뭐가 다른 건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우리 스페인 가족에게는 난생처음 겪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점심이 끝나고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는 게 더 낫네."




얼마 전 세계 책의 날(4.23)을 맞이하여 스페인 세르반테스 문학상의 주인공의 시상이 있었다. 전통대로라면 세르반테스의 생가가 있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라는 도시에서 여러 의전에 따른 행사를 한 뒤 국왕 부부가 수상자에게 메달을 걸어주어야 했다. 국왕 연설과 수상자 소감도 이어질 터였다. 그런데 올해 수상자는 89세 고령의 시인 프란시스코 브리네스였다. 그의 건강상태로는 도무지 코로나 시국에 그가 살고 있는 발렌시아에서 알칼라 데 에나레스까지 올 수가 없었다. 결국 전통은 깨졌다.


대신 국왕 부부가 직접 발렌시아, 그것도 시인의 생가로 갔다. 그의 집 작은 마당의 라탄 의자에 앉아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시인의 조카, 스페인 문화부 장관, 스페인의 국립국어원 격인 RAE 원장도 함께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전혀 엄숙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 국왕 부부는 시인을 축하했고 시인은 자신의 고향집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세르반테스 문학상 수상자의 집 안뜰에서 축하하는 국왕 부부 (출처: El Pais)


사실 국왕 부부가 세르반테스 문학상 수상을 위해 직접 수상자를 찾아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도 바르셀로나에 사는 수상자 조안 마르가릿을 직접 찾아가 상을 수여했다. 그 역시 고령이었으며 3개월 전 작고했다.


전통은 깨질 수 있다. 그리고 깨져도 대개의 경우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역사책이나 등장할 것 같은 가문, 무려 부르봉 왕가 태생의 왕이 있어 의전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왕실 행사에서도 이렇게 전통은 깨지곤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때때론 이렇게 아주 긍정적이며 유쾌하고 새로운 전통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 그러고 보면 참,  작가의 수상을 위해 국왕부부가 직접 행차할 정도라니 새삼 잘 쓴 글이 갖는 힘도 실감하게 된다. 글이 이렇게 무섭고 대단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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