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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y 22. 2021

이번 봄에는 행복을 선택하겠습니다

비워내니 마주친 찬란한 봄의 아름다움

지난 4월 내내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나 이제 위태로운데'라는 생각이었다. 뭐가 위태로운지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정말 끝에 서 있는 느낌,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밑도 끝도 없는 곳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곤두박질을 치던 밤이 있었다. 4월의 마지막 밤이었던 금요일 저녁이었다.


와인과 함께 적당히 즐거운 저녁식사를 즐기고 잠자리에 들었건만 역시 쉬이 오지 않는 밤잠에 다시 일어나서 남은 와인을 털어 마셨다. 오랜만에 취기가 느껴졌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 새로운 와인병까지 따서 마셨다. 그것마저 마시고 나니 이상하게 배가 고파져 컵라면을 하나 먹었다. 평소라면 잘 있을 리 없는 음식인데 그날따라 또 하필 있었다. 그즈음에서 기분은 급격히 우울해졌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엉엉 오열을 하다가 잠이 들었던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술, 라면, 그리고 오열의 쓰리콤보로 얼굴과 몸은 퉁퉁 부어 있었다. 눈의 모양과 안색까지 달라져 있었다. 전날 밤 혼자 울면서 느낀 감정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에 술이라는 것에 갑자기 진절머리가 났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나는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을 선택해보기로 했다.




우선 평소보다 더 꼼꼼히 청소를 했다. 살균이 된다는 새로운 세제를 사서 욕실도 박박 닦았다. 청소를 마친 욕실은 수영장에서 났던 락스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그 냄새가 독하다기보다는 청결의 표식 같아 좋았다. 매번 청소를 마치고 청소기의 먼지통을 비울 때면 엉킨 머리카락들이 한 움큼씩 나왔다. 이렇게 매일 머리가 빠지는데 내 머리는 어떻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렇지만 먼지와 머리카락 뭉치를 털어낼 때면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눈에 즉각적으로 보이는 성과여서 그런 듯하다.


술도 끊었다. 모든 기호식품의 시작이 늦었던 나는, 커피도 이십 대 중반에서야 마시기 시작했고 술도 삼십 대에 들어서야 자발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와인을 좋아해 집에서 음미하면서 마시는 혼술 예찬론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4월 마지막 날의 음주는 이 모든 것에 회의감을 주었고 앞으로 굳이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말자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술을 주기적으로 마시지는 않았기에 끊었다는 게 큰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 달 들어 마신 술은 저녁 먹을 때 마셨던 레드와인 한잔이 전부이다. 요즘 날이 좋아 오후마다 테라스에 가곤 하는데 그때도 그냥 무알콜 맥주를 마신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몸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음주 후 몸의 붓기를 빼려고 식사를 조절하고 운동을 했는데 기왕 이럴 거 다이어트를 좀 해볼까 싶었다. 비워야 새로운 걸 채울 수 있다고 믿는 나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기분을 몸을 비우는 것으로 이겨보고 싶었다. 식이와 나름 꾸준한 유산소 운동 그리고 최근 다른 스트레스로 인해 5월 들어 살이 3kg 정도 빠졌다.




이 세 가지를 하며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지난해부터 그렇게 바꿔보려 해도 바꾸지 못했던 올빼미족 생활은 최근 특별히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사라졌다. 이제는 늦어도 새벽 1시쯤에는 잠에 들고 아침 9시가 되기 전 저절로 눈을 뜬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는 흐릴 거라는 어제의 예보와 달리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때 문득 찬란히 아름다운 2021년의 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거리를 걸으면 마스크를 쓴 채로도 느껴지는 아카시아 향과 장미 향이 얼마나 좋은지, 공원 잔디에 알록달록한 피크닉 매트를 펼쳐 놓고 앉아 먹는 샌드위치 맛은 또 얼마나 좋은지, 그 공원에 비키니만 입고 누워 태닝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을 그 누구도 의식하거나 음흉하게 바라보지 않는 이 도시의 자유가 내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말이다.


행복은 무조건적인 방종보다는 통제에서 온다는 사실을 참고 비워내며 알게 되기도 했다. 조금 더 비워내며 행복해지는 봄이 되었으면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찬란한 봄은 늘 돌아오니까. 응당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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