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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y 26. 2021

인종차별 제가 당해봤는데요

내가 왜 치니따야?

스페인에 살며 일상생활에서 크게 인종차별을 당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일상생활이라고 굳이 조건을 다는 이유는 만약 내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스페인 이름과 얼굴을 가진 사람들과 한정된 파이를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차별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당하는 차별이야 기분 나쁘게 나를 치니따(중국 여자를 낮춰 부르는 말)라고 부르는 무례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정도이다. 아시안을 가리켜 치노 혹은 치나라는 중국인으로 통칭해 부르는 말은, 무례함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중국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시안 하면 중국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그냥 부르는 거야'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여기서 살다 보면 나도 가끔 동양인을 가리켜 치노 혹은 치나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건 백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치니또 혹은 치니따라고 낮춰 부르는 것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냥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여도 그건 분명 낮춰 부르는 말이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필요 이상의 친근감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나를 대하기 쉬운 낮은 상대로 인식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니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건 <또렌떼(Torrente, 1998)>라는 스페인 코미디 영화 때문이다. 영화에서 중국식당에 간 주인공은 녹말이 풀어진 소스가 마치 콧물 같다는 둥 젓가락은 뭐 북이라도 치라고 갖다 준 거냐는 둥 온갖 조롱을 하며 여종업원을 '치니따'라고 무례하게 불러댔다. 이 영화가 스페인 사람들에게 거의 인생 코미디 영화 수준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제일 유명한 게 바로 저 중국식당 씬이라는 점이 유감이다. 그들은 이 영화가 너무 재밌어 미칠 지경이겠지만 난 저 씬을 보고 전혀 하나도 웃기지 않았고 오히려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 현지인들도 일부 '지금이라면 불가능한 유머'라고 말하기도 한다. (코미디를 할 때 약자나 소수자를 대상으로 웃기는 코미디가 지양되어야 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스페인에 살면서 엄청 자주 치니따라는 소리를 들은 건 아니다. 빈도로 치면 거의 1년에 한 번 정도 들은 듯하다. 그래서 유독 각 상황이 세세히 기억이 나기도 하는데 그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게 있다. 유럽의 봉우리들이라 불리는 피코스 데 에우로파(Picos de Europa)라는 스페인 북부 산맥으로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트래킹 해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면 봉우리 밑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정상 부근까지 올라서 호수를 보고 산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자연환경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예쁜 사진을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원피스에 분홍색 케이프(!)를 입고 이 곳에 갔다. 신발은 운동화가 아닌 앵클부츠였다.


막상 올라가 보니 트래킹 코스로 닦아 놓은 부분 말고 호수로 가는 길은 진흙이 질퍽하게 있었다. 그나마 되도록 덜 질퍽한 곳을 골라 걷느라 부츠 끝을 세워 요리저리 걷는 나를 보고 멀리서 어린아이 두 명 그리고 와이프와 함께 걸어오던 남자가 외쳤다.


"저 치니따 좀 봐! 거의 걷질 못하네 하하하하!"


여기 살면서 10번의 치니따란 소리를 들었다면 5번은 아이나 청소년에게 들었는데 분명 저런 무식한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돌아본 남자의 머리가 너무나도 분명한 대머리였기에 나도 좀 멀리 떨어져 있던 남편을 향해 스페인어로 외쳤다.


"저 대머리 좀 봐! 내가 스페인어 못 알아들을 줄 알았나 봐 하하하하!"


순간 욱하는 마음에 대범하게 외쳤지만 솔직히 쫓아와서 해코지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나의 외적인 부분을 가지고 무례한 말을 했기에 나도 그의 가장 눈에 띄는 외모 특징을 가지고 되받아 쳐주고 싶었다. 다행히 별 일 없이 오히려 부인과 아이들이 부끄러워하며 우리에게서 멀리 사라졌다.


사실 별로 추천하는 방법은 아니다. 대체로 교양 있는 시민이라면 속으로는 무슨 인종차별적인 욕을 하든 그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그러니 저런 사람들을 상대했다가는 더 곤란한 일을 당할 수 있다. 나도 웬만해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저 날과 더불어 대응을 했던 날이 한 번 더 있긴 했다.




출근길 지하철 자리에 앉아 한국 책을 읽으며 가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대뜸 내가 읽는 책을 가리키더니 "이 부분 해석해봐!"라고 말했다. 나는 큰 저항 없이 해석해줬다. 그러자 "어휴 중국어는 이게 뭐야. 이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읽어."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차분하게 이건 중국어가 아니고 한국어라고 설명해줬다. 이때 인종차별자들의 특징이 나온다. 그들이 어차피 알고 싶은 건 내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가 아니다. 그냥 동양인이라 괜히 건들고 싶은 거다. 그러니 내가 한국인이라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 아줌마도 역시 비슷했다. "어휴 어쨌거나. 그게 그거지." 라며 갑자기 가방에서 고작 마트 전단지를 찾아 꺼내며 거기에 적힌 글자를 가리킨다. "이것 봐. 스페인어는 이렇게 간단해. 근데 그게 뭐? 다시 한번 거기 해석해봐!"


......그때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 아줌마 얼굴을 보았다. 100% 중남미 이민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건들고 싶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대응으로 또 다른 인종차별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주의라 그냥 참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걸 너한테 해석해 줘야 할 이유가 뭐야?"


그녀는 다행히 입을 다물었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 경험은 분명 어떤 상처로 남아 이후 지하철에서 한글로 된 걸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분노할 때도 있고 씁쓸할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게 그냥 내 땅 떠나 사는 사람의 숙명이거나 받아들이는 것도 같다. 다행히 스페인이 유럽 내에서 인종차별 지수가 아주 높은 편에 속하는 나라는 아니다. 다만 최근 정부 발표에 의하면 인종차별을 겪은 사람들의 80% 이상이 아무런 신고나 조치를 강구하지 않는다고 하니 수치와 현실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겠다.(스페인은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신고 대상이다.) 비단 아시안뿐만 아니라 흑인, 유대인, 아랍인, 집시, 중남미 이민자들도 모두 차별의 대상이 되니 나와 또 다른 인종이 겪는 차별은 알지 못하기도 한다.


희망적인 사례도 있다. 몇 년 전 바르셀로나 열차에서 흑인 승객에 대한 차별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지하철 보안 요원이 한 열차 칸에 들어와 유일하게 흑인 승객에게만 가서 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 승객은 보안 요원은 표 검사를 할 권리가 없다, 나에게만 요구하는 건 인종 차별이다, 필요하면 역무원이 와야 보여주겠다며 표 제시를 거부했다. 결국 보안 요원들이 그 승객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려고 했고 그 난리를 누군가 영상으로 찍어서 제보한 것이다.


그 영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지하철 보안 요원들이 흑인 승객을 강제로 끌어내리려고 할 때 주변 스페인 승객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지금 당신들이 하는 건 인종차별이고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항의한 것이다.


저런 경우까지 겪지 않았지만 나도 공공장소에서 따뜻한 스페인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가령 지하철에서 서서 가다 잠시 어지러워 주저앉았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내게 자리를 양보하고 같이 역에 내려서 괜찮냐고 계속 물어봐 준 이가 있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면 다가와서 들어준 사람은 정말 많았고, 한 버스역 화장실에서 멀미를 해서 구역질을 하고 있자 문을 두들기며 괜찮냐고 구급차를 불러주겠다고 외친 이도 있었다.


물론 아무리 훈훈하게 마무리해보려 해도, 내일 당장 길 가다 또 치니따를 듣는다면 분명 속으로 심한 욕을 내뱉으며 지나갈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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