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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n 05. 2021

퇴고만 50번 하는 사람

그게 접니다.

제목이 너무 길어질까 봐 바꿨는데 원래 쓰려던 제목은 <브런치에 올리는 글을 50번이나 퇴고하는 사람이 있다고요?>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거다. 이곳에 올리기 위해 퇴고를 50번씩 한다는 게.


보고서나 기사를 쓸 때면 일단 첫 문단 잡고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며칠씩 끙끙 앓기도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다르다. 대가를 받지 않고 쓰는 개인적 글 공간이고, 쓰고 싶은 주제를 마음대로 쓰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쓰고 싶은 이야기만 생기면 굉장히 빨리 쓰는 편이다. 말 그대로 일필휘지에 가깝다. 실은 잘 안 써지는 글은 그냥 쓰다 포기하기 때문에 일필휘지가 되는 거기도 하지만 어쨌든.


문제는 퇴고다.


글을 쓰자마자 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글을 쓰다 중간에 흐름을 놓치기 싫어 대충 아는 지식은 일단 써놨다가 나중에 팩트 확인 후 올리려고 보류하기도 하고 일상 에세이는 글을 쓴 순간의 감정에 너무 몰입해 쓸데없는 소리를 남발했을까 봐 우선 서랍에 넣어두기도 한다.


그렇게 넣어둔 글 중에는 영영 서랍에 머무는 글도 있지만 결국 발행되는 글은 -믿을 수 없겠지만- 최소 50번은 퇴고한 글들이다. 도대체 인터넷에 올리는 글을  50번이나 퇴고를 하냐고 묻는다면, 일단 콤마 하나라도 지우거나 첨가하면 첫 글자부터 다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번 읽을 때마다 뭐 하나라도 바꿀 게 계속 보인다. 대단한 건 아니다. 주제에서 벗어난 문장들이 있으면 잘라내고, 어색한 접속사 조사, 반복되는 동사 이런 것들을 사소하게 바꾸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게 뭐가 되었든 하나라도 수정을 했으면 처음부터 글 전체를 다시 읽어야만 한다. 그러니 발행 직전에는 내 글인데도 도저히 토나와서 더는 못 읽겠다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얼른 민트색 발행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버리고 싶다.


내가 이렇게 퇴고성애자가 되고 만 건 다 첫 회사에서 만난 사수 때문이다.

첫 직장은 한국 대기업의 해외 법인이었다. 스페인에 살 거라는 결정을 했을 때부터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였고 한 번의 고배 끝에 1년을 다시 꼬박 준비해 들어간 회사였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생소한 재무제표를 들먹이며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고(지금도 재무제표 어떻게 보는지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자료를 취합하려 다른 부서, 특히 많은 경우 상사들을 '쪼아야' 했다.


"쪼아서 어떻게든 받아내!"


새가 부리를 쫀다는 게 아니라 사람을 쫀다는 의미로 저 동사를 활용해본 게 처음이었다. 그렇게 쪼아서(실은 쪼여서) 자료를 받아내면 그걸 토대로 최종 보고 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첫 보고서는 대리님과 부서 선배님의 도움으로 겨우 완성했다. 엑셀 화면 가득 채운 숫자들과 수많은 탭들, 그리고 회사에서 쓰던 양식에 딱 들어맞는 틀과 폰트들로 이루어진 보고서였다. 많은 부분 기계적으로 만든 자료이기 때문에 뭐가 뭔지는 하나도 몰랐지만 어쨌든 보기에는 썩 그럴싸한 자료였다. 끝냈다는 후련함에 내 손은 당장 모든 부서장과 법인장을 수신자로 하는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대리님이 말했다.


"자료를 완성하면 후련하기도 하고 지겹기도 해도 빨리 전송하고 싶지? 그런데 전송하기 전에 재차 틀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 또 확인해야 해. 전송한 자료에 오류가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발견하거나, 나중에 루나씨가 발견해서 자료를 재전송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루나씨가 애써서 만든 자료의 신뢰감이 사라지는 거야. 그런 일이 한두 번만 생겨도 아무도 루나씨가 만든 자료는 믿지 않게 되니 다시 확인해봐."


기업의 엑셀 자료라는 게 수식이 수없이 걸려 있다 보니 하나의 오류를 고치다 보면 다른 수식이 꼬이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다 작성된 자료에 오류가 보이면 차라리 그냥 그 자료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빠른 경우도 있었다. 시간도 촉박한데 겨우 완성한 자료를 버리고 다시 만들기가 너무 싫어서 오류가 보여도 그냥 모른 척 보내고 싶었던 적도 있다. 나는 기한 내에 보냈다는 명분이 있고,  실수를 다른 사람이 미처 못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매번 대리님 말을 떠올리며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꼼꼼히 자료를 재확인하곤 했다.




물론 그래서 그나마 두 번 실수할 거 한번 실수했다뿐, 실수는 늘 했다. 이 공간의 글도 그렇게 토 나오게 퇴고하지만 대부분 글을 발행하고 나서 또 자잘한 수정하는 경우가 엄청 많다. 그놈의 접속사! 그놈의 조사! 그놈의 콤마가 뭐라고! 내 글을 그렇게 꼼꼼히 읽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을 건데. 이 글은 언제쯤 발행할 수 있을까. 중간중간 수정하고 퇴고하며 썼으니 지금까지 한 5번 정도 본 것 같다. 그럼 앞으로 45번 정도만 더 읽고 수정하면 발행할 수 있겠다.






+ 업무 확인 덕분에 그나마 실수를 덜 했던 것처럼, 퇴고를 많이 한 덕분에 많이 부족할 거 그나마 덜 부족한 글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유난인 건지 아니면 다들 이 정도는 하시는 건지, 다른 작가님들 글 쓰는 스타일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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