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용감히, 그리고 분명히 저런 첫 문장을 쓸 수 있을 만큼 술을 좋아한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과 자주 마시고 취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물론 좋아하다 보니 자주 마시게 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애주가 치고는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다. 그저 술 자체에 관심이 많고 좋아해서 다양한 주종을 마셔보기를 주저하지 않고, 술자리에서 잘 빼지 않는 편이다. 삼십 대 들어서부터 좋아하기 시작한 술이다. 퇴근 후 공복에 때려 마시던 맥주가 시작이었다.
오! 술 좀 드시나 봐요!
술자리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이런 말을 듣곤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약간의 '술부심'이 있었던 적도 있다. 술 취해도 정신차리는-부심, 집 잘 찾아가는-부심, 물건 안 잃어버리는-부심, 토하거나 얼굴 빨개지지 않는-부심, 다음날 숙취로 별로 고생하지 않는-부심, 다양도 했다. 이제는 저런 말을 들으면 황급히 손을 내젓으며 이런 말을 한다.
"술 먹고 네발짐승 된 적이 있어서, 함부로 자신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네 발로 걷는사람이 되든, 직립보행하는 개가 되든혼자집에서라면 문제없다.
그러니 모름지기애주가라면 홈술과 혼술이 진리이다. 실제로 사람들과 마시는 술자리보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술을 더 좋아했다. 특히 와인 마실 때 그랬다. 애주가답게 술 마실 때 안주 배부르게 먹는 걸 싫어하는데, 간단히 차려놓고 와인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게 좋았다. 사람들과 함께 마시면 와인을 소주처럼 마셔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 맛을 음미하기가 어렵지만 혼술은 다르다. 혼자 불 꺼진 거실에서 낮은 불빛의 스탠드를 켜놓고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세팅한 다음에 아끼는 와인잔에 천천히 따라 마시는 와인!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달이 밝으면 달이 밝은 대로,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이 부는 대로 모두가 썩 어울리는 시간들이다.
더운 여름밤이면 얇게 저민 오이를가니쉬로 넣은 진토닉이나 혼자 마셔도 제대로 얼음 바스켓까지 세팅해두고 마시는 샴페인이 제격이다. 술, 음악 그리고밤과 함께라면 내가 있는 곳이 와인바이고 칵테일바였다.
지난 여름밤의 진토닉, 이날의 배경음악은 잔나비의 곡이었다.
그러니 왜 사랑하지 아니했던 시간들이었겠는가.
그러나 혼술의 시대는 갔다.
시간이 흐르면 인연도 지고 사랑도 지듯이 술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졌다. 여전히 술 마시는 자리에서 빼지는 않지만, 일부러 마시지는 않는다.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도 잔을 부딪히는 분위기가 아니면 굳이 먼저 술잔을 들거나 마시기를 권하지 않는다. 눈치껏 입만 축이고 내려놓기도 한다. 하물며 혼술은 아예 끊었다. 술이라는 게 좋은 기분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어 특히 그런 걸 경계하게 되었다.
요즘은 늦은 오후마다 바에서 한잔씩 하는데, 술은 안 마시려다 보니 택한 게 무알콜 맥주이다. 다행히 스페인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무알콜 맥주가 있고 어디에서나 아주 흔하게 판다. 이 중 0.0%라고 쓰여있는 맥주는 정말 완전 무알콜 맥주이고 Sin(스페인어로 '없이'라는 뜻의 전치사)이라고 적힌 건 알콜이 1% 미만으로 함유된 것이다.
올여름 가장 자주 마시는 무알콜 맥주는 마드리드 맥주인 마오우(mahou)의 토스타다 무알콜 맥주이다. 잘 볶아진 맥아의 향 덕에 구수하면서도 살짝 캐러멜 향이 도는 진한 갈색의 맥주이다. 무알콜이지만 무게감이 제법 있으면서도 크리미하게 넘어간다.
마오우 tostada 0.0% 맥주 (출처: 마오우 맥주 홈페이지)
조금 더 트렌디한 바에 가면 무알콜 맥주도 크래프트 비어로 내준다. 필스너 스타일도 있다. 실은 크래프트 비어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맥주는 청량한 목넘김 맛으로 먹는 촌스러운 사람이라 무조건 공장(?) 라거 스타일을 고집한다. 크래프트 비어는 같은 라거여도 어쩐지 내 입에는 살짝 느끼하고 끈적이는 느낌이 있다. 그럼에도 얼마 전 마셔본 스페인 톨레도의 도무스(Domus)라는 주조장의 무알콜 크래프트 비어는 꽤 만족스러웠다. 알콜이 없어서인지 일반 크래프트 비어에서 느꼈던 끈적이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스페인 크래프트 비어 브랜드 도무스의 무알콜 맬주(좌) | 독일 맥주 벨틴스의 무알콜 필스너 맥주(우)
이제 술 잘 안 마시다는 사람이 대신 무알콜 맥주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하고 있다. 과연 이 글의 첫 문장을 '나는 애주가다'라고 당당히 적은 사람답다. 어쨌거나 무알콜이므로 술은 아니다.
이것은 보리 맛 탄산음료다!
그나저나 요즘 무알콜에 빠진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닌 듯하다. 며칠 전 마트에 갔을 땐 아무리 찾아도 무알콜 맥주가 보이지 않길래 알고 보니 다 팔리고 없는 거였다. 덕분에 뒤지고 뒤져서 겨우 한두 캔 남은 걸 털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트와이스의 이번 신곡도 <알콜프리>이다. 어제는 바 테라스에 앉아 무알콜 맥주를 마시고 일어났는데 정말 약간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나는 alcohol-free 근데 취해 (취해, 취해) 마신 게 하나도 없는데 (없는데) 너와 있을 때마다 이래 (이래, 이래) 날 보는 네 눈빛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