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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ul 09. 2021

달 없는 밤

몇 년 전 걸었던 해안가 산책로를 다시 걸었다.

우리는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었고, 조금 더 산 죄로 조금 더 많은 실수를 했지만 더 여물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더 나아지기도 했다. 바다의 습기를 품은 산책로에선 여전히 나무 냄새가 났다. 그때와 같은 듯 다른 해안가를 걸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한다.


오늘은 달이 없네


몇 년 전에는 보름달이 비추는 달빛이 잔잔하게 일렁이던 바다 위에 끝없는 길을 내고 있었는데 이날은 달이 없었다.


달.


스페인어 이름을 달이라는 뜻의 루나로 정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교 첫 말하기 수업이었고 나는 아직 이름이 없는 채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급하게 가지고 있던 회화 책을 뒤져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를 내 이름으로 소개했다.


Me llamo Luna. [메 야모 루나]


나는 루나라고해, 라고 말한 순간 나는 루나가 되었다.

너무나 급하게 정한 이름이었고 애칭 같이 들리는 이름이기도 해 여러 번 이름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알리씨아도 되었다가 훌리에따도 되었다가 세레나도 되었다가. 그래도 결국에는 루나로 돌아왔다. 달이 좋아 루나가 되었는지 내가 루나였기 때문에 달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나는 달을 좋아하는 루나가 되었다.


혼자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루나틱>이라는 연극이었다. 좋아하던 여자 선배의 영어 이름이 켈리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싸이월드 대문에 '켈리틱'이라고 적어두었다. 그럼 나는 루나틱이겠다, 하고 생각해보니 '미친'이라는 뜻이다. 뭐든 남들과는 달라 보이고 싶은 스무 살이었으므로 그 뜻도 그 뜻대로 괜찮았다. 재밌는 연극으로 알려졌던 <루나틱>을 보고 혼자 엉엉 울었으니 과연 루나틱한 스무 살이었다.



 

사는 게 참 달 같다.

달 같아서 기우는가 하면 어느새 차고 차는가 하면 어느새 기울고 만다. 그러니 크게 기뻐하지도 크게 슬퍼하지도 않고 덤덤히 살려고 노력한다. 타고난 그릇이 작은 일에도 크게 행복하고 크게 불행한 사람이라 쉽지는 않지만.


사람도 달 같아서 누구나 남들은 절대 볼 수 없는 뒷면을 가지고 산다. 계속 변하는 게 사람이라 누군가는 초승달일 때 만나고 다른 누군가는 보름달에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니  누군가 내게 '그 사람 참 뾰족하더라'고 말해도 그냥 그날은 초승달이 떴나 보다 생각하고 만다.


달 없는 밤, 어느 때보다 달 생각을 많이 하며 걸었다.

어떤 부재는 존재보다 더 깊이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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