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나 Aug 28. 2021

스페인 여름 끝에서 만난 정관스님

물러나길 주저하는 더위가 아직은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8월 말이다. 제 아무리 용을 쓰고 버텨봤자 아침저녁으로 부는 찬 바람 때문에 한낮의 더위는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 완숙해진다. 완숙해진다는 것은 보다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너그러운 태양이 질척거리는 마음까지 가볍게 말려주는 스페인의 여름 끝에서 큰 어른, 정관스님을 만났다.




애당초 세상에 내세우기 위한 삶은 추구할 깜냥도 열정도 못 가지고 태어난 탓에 남 보기 부끄러워서는 아니다. 그저 스스로 참 잘했다는 말을 자신 있게 건넬 수 있을 만큼의 삶도 살고 있지 못한 게 부끄러울 뿐이다. 그런 사람이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는지 큰 어른을 가까이서 모실 기회를 이 머나먼 땅, 스페인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의 스님에게 맞추어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이며 산신령 같은 눈빛을 가진 스님의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스님의 목소리가 되어 부족한 사람이 큰 어른의 말을 전달하다가 듣는 이와 함께 복받치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응당 그러해야 해서 시간은 흘렀고 스님과 마지막 작별을 할 시간도 다가왔다.


헤어지며 스님은 가서 먹으라며 손수 지으셨던 밥을 건넸다. 계시는 날들 중 하루가 스님 생신이었기 때문에 스님이 생신날 드시기 위해 따로 남겨두었던 밥이라는 표식이 적혀 있었다. 불교 스님들은 매일이 태어나고 죽는 날이라 따로 생일을 축하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 하셨지만, 그래도 스님 생신 밥을 대신 들고 오는 마음이 이상하게 과분했다. 그 생신 밥은 내가 오늘 아침에 다 먹었다. 밥으로 아침을 먹은 지가 언제인지도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그 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밥을 잘 먹지 않는 집이고 그나마도 며칠간 바빠 집에서 식사를 하지 못한지라 냉장고에는 반찬이라고 할 게 없어 맨밥만 먹었다.


그냥 밥 먹는 일을 왜 공양한다고 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면 대승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언젠가 부처님이 될 존재다. 내 안에는 소중한 불상이 있다. 내가 먹는 한 끼 식사를 공양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한 끼 식사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된다.

- <한국의 사찰음식(한국불교문화사업단 발행)> 중에서


부족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부처님이 대신 드신 밥일 것이다. 며칠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스님을 뵈었는데 이상하게 돌이켜 스님을 떠올릴 때면 고적한 산길을 홀로 걷고 계신 스님의 뒷모습만 떠오른다. '해가 좋아 오래 걸어도 발이 가볍다'며 모두가 덥다 덥다 하는 마드리드의 여름을 참 좋아하신 스님이었다. 그 걷고 계신 길에 와락 달라가 오래도록 스님을 꼭 안고 싶다.


참 좋은 인연이다. 참 좋은 여름이었고 참 행복한 날들이었다. 좋은 날 좋은 곳에서 다시 한번 스님의 천진했던 미소와 마주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 없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