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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Sep 04. 2021

스페인 사람들의 다정한 호칭

제가... 딸이라고요?

"우리 딸은 뭐 줄까?"


예상치 못한 딸이라는 단어에 당황해 말문이 막힌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빵집 아주머니는 분명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딸이라고? 내가?'


어찌나 당황했던지 열심히 외웠던 '바게트 한 줄 주세요'라는 스페인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 딸 뭐 주냐고?"


빵집 아주머니는 다시 다그치듯 물었다. 딸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다운 느낌과는 별개로 말투는 매서운 회초리가 따로 없었다.


"아, 네. 바, 바게트 하나 주세요."


더듬더듬 외웠던 스페인어를 내뱉기 무섭게 작은 포장지로 재빠르게 두른 바게트를 툭 건넸다. 그 바게트를 가지고 집에 오는 내내 빵집 아주머니는 왜 나를 딸이라고 부른 걸까 생각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지 일주일쯤 지난 2005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 뒤로도 스페인 사람들, 특히 중년층 이상의 여자분들은 나를 딸이라고 자주 칭했다. 공통적인 특징은 처음 만났던 빵집 아주머니처럼 딸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말투는 굉장히 투박하다는 것이다. 스페인어로 딸은 이하(hija)인데 억양으로 보자면 '이하~'보다는 '이하!!!'에 훨씬 가깝다. 한국어 표현으로는 '으이구 우리 딸!'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시간이 지나면서 딸이라는 표현이 꼭 진짜 딸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고 그냥 다정한 호칭 정도로도 쓰인다는 걸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었다. 실제로 스페인 왕립 국어원 사전에는 딸/아들 단어에 대한 정의가 10개나 나오는데 그중 5번째 정의는 <아끼는 사람들끼리 애정을 담아 부르는 호칭>이라고 되어 있다. 덕분에 재밌게도 스페인에서는 진짜 딸이 엄마에게 되려 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생각해보면 한국도 스페인처럼 가족이 아닌 이에게 가족의 호칭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모, 삼촌이라는 호칭이 특히 그렇다. 한국의 이런 호칭도 스페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좀 더 친근하게 부르는 암묵적 합의이다. 두 나라 모두 오지랖이 넓은 만큼 서로 정 넘치게 챙겨주는 문화가 있어서 이런 점마저 닮았나 싶다. 얼마 전에는 남편과 마드리드의 한식당을 갔다가 이런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한식당 사장님들은 대체로 교민사회 터줏대감님들이 많아서 손님들 얼굴을 많이 알고 있다. 오랜만에 간 한식당에 마스크까지 하고 가서인지 사장님은 우리를 못 알아보시고 마드리드에 사는지 물어보셨다. 한식당에 가면 이런 질문들 역시 익숙한지라 그렇다고 대답을 하며 밥을 먹으려 마스크를 벗었다. 그제야 맨 얼굴을 보신 사장님이 다시 한번 이제 얼굴 보니 기억이 난다고 웃으셨다. 남편의 얼굴도 보시더니 덕담을 몇 마디 하시고는 식사를 내주셨다. 그렇게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사장님이 남편을 보고 이렇게 외치시는 것이다.


잘해!


외국인 남편더러 같은 한국인인 나에게 잘해주라는 그런 의미이다. 저 단 두 음절로 그 말을 했고 그걸 또 찰떡 같이 알아들은 나는 남편에게 전달해주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게 어찌나 유쾌했던지 아까 먹은 설렁탕보다 속이 더 뜨끈하게 훈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말은 사실 스페인에 살며 나도 남편도 여러 번 들었다. 다녔던 회사의 한국 남자 상사분들도 남편만 만나면 그렇게 루나한테 잘해야 한다고 했다. 간혹 잘 못하면 혼낸다고 으름장을 놓는 분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불편하다기보다는 든든한 빽을 둔 기분이 들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아마도 친정 아빠 같은 오지랖이어서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어김없이 가게에서 '이하(딸)!'이라고 소리치며 물건을 건네주는 스페인 아주머니와 남편에게 '잘해!'라고 외치는 한식당 사장님을 만난 날, 이 정도면 스페인에서도 나를 챙겨주는 엄마 아빠 같은 사람이 되게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투박한 두 음절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정다움이 가득 묻어있어 마음이 괜스레 말랑말랑해진다. 그저 관습이나 습관에 따른 언어였다고 해도 그런 다정한 호칭 사이에는 분명 따뜻함이 묻어 있다.


처음 본 외국인에게도 다정한 호칭을 건네는 이곳은 스페인이다. 첫가을 날 느꼈던 그 마음 그대로 닳지 않은 시선을 스페인 가을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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