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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Sep 18. 2021

모든 게 엉망이지만 모든 게 괜찮은

이곳은 스페인입니다


스페인에서 한국인의 얼굴로 사는 일은 안 그래도 자처해왔던 주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스페인 사람 다 됐네' 소리를 듣고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동양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두 가지 정체성은 내 안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진다. 며칠 전 신속 정확한 걸 중시하는 한국인이라면 다소 성가셔했을 일을 겪고도 아직 그 사건(?)이 생각날 때마다 목젖을 드러내며 깔깔깔 웃고 있으니 이번 에피소드는 '스페인 사람 다 됐네'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의 시작은 내 신상의 변화가 생기며 관련 정보를 스페인 사회보장기관에 업데이트해야 하는 데서 시작했다. 노무사를 통해서 하려니 개인정보라 개인이 직접 해야 하는 절차라 하여 사회보장기관에 전화를 했다.


상담원: "안녕하세요. 마드리드 사회보장 안내 센터입니다."

나: "안녕하세요. 제가 A 정보를 업데이트하려고 하는데 방문하지 않고 원격으로 처리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상담원: "네. 저희 기관 홈페이지 가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배너를 클릭해서 <블라블라>를 클릭하고 <어쩌구저쩌구>를 클릭하신 다음 <요런저런> 서류를 업로드해서 보내면 됩니다. 온라인으로 다 할 수 있습니다."

나: "아이쿠 감사합니다. 아디오스"


스페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품을 물었을 씨타(cita-약속 혹은 사전 방문 예약)를 잡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서류 처리가 가능하다니 스페인도 역시 발전하고 있구나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사회보장기관 홈페이지로 갔다. 하지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배너까지는 맞았는데 그다음 절차부터 묘하게 안내받은 내용과 달랐다. 어찌어찌 가장 비슷한 곳을 찾아내서 <요런저런>서류를 업로드해서 송부했다. 그게 화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메일 알람이 떠서 보니 무려 아침 8시 58분에 사회보장기관에서 답장이 왔다.


'아니, 출근 시간도 전에 답장을 보내다니! 오 스페인!'


대충 읽어본 내용은 온라인을 통해 서류를 다시 보내거나 이메일로 회신하면 자기들이 처리해준다는 내용이어서 우선 해야 할 일을 마치고 하려고 그냥 두었다. 그렇게 그날 오후 다시 읽어본 메일의 내용은 너무 황당하여 내가 혹시 잘못 이해했나 눈을 비벼가며 세 번을 읽어야 했다. 메일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귀하가 요청하신 A 정보 업데이트는 홈페이지에서 처리 가능합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1로 가셔서 B 정보 업데이트를 클릭하신 후 내용을 수정하시거나
2로 가셔서 C 정보 업데이트를 클릭하신 후 내용을 수정하시면 됩니다.

  

'음? 아니 나는 A 정보를 업데이트한다고 했는데 B랑 C 정보 업데이트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어쩌라는 거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혹시 B 정보나 C 정보 업데이트 메뉴로 들어가면 A 정보 업데이트 항목도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사회보장기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알려준 두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았지만 A 정보 업데이트는 불가능했다. 덤덤하게 역시 안되는구나 생각하며 메일 말미에 '이 메일로 회신하면 우리가 업데이트해주겠다'라는 문장이 있었던 게 기억나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위의 방법이 힘들 경우 메일로 <요런저런> 서류를 회신하면 저희가 A 정보 업데이트를 진행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서류 파일은 하나의 이메일에 첨부하여 현재 이 메일로 회신하셔야 하며 파일 형식은 PDF나 JPG만 가능합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까지만 읽으면 매우 친절한 이메일 같았는데 문제는 저 메일의 인사말 끝에 한 문장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그것도 대문자, 굵은 글씨, 밑줄까지 쳐서.


이 메일에 회신하지 마시오.



문제의 이메일. 마지막 크고 굵은 대문자 문장이 '이 메일에 회신하지 마시오' 이다



심지어 메일의 모든 글씨 중 저 문장의 글씨 크기가 제일 컸다. 아니 이 메일로 회신하면 자기들이 처리해준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이 메일에 회신하지 말라는 협박은 무엇인가. 그래도 국가기관에서 온 메일인데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나 메일보다는 나를 더 의심하며 원어민(남편)의 감수까지 요청했다.


"읽어봐 봐.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원어민의 검수 하에 다시 한번 처음부터 사회보장 기관에 가서 알려준 대로 정보 업데이트를 시도했으나 역시 불가, 메일의 마지막을 읽은 원어민은 황당해하며 이게 무슨 말이냐고 오히려 더 역정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이미 웃음이 터져서 거의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국가기관의 메일이어서 메일 말투가 하필 엄숙하면서도 진지해서 더 웃겼다. 엄숙한데 헛소리만 하는 메일의 마지막 부분을 둘이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으며 진짜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비록 메일의 마지막은 이 메일에 회신하지 말라는 문장이었으나 그 앞서는 이 메일로 회신하면 된다는 문장 또한 있었으므로 깊게 고민하거나 다시 문의하지 않고 그냥 회신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수요일 밤 관련 서류를 모두 회신했다.


"아마 내 생각에는 이 메일 회신은 서류 회신만 가능하지, 추가 문의나 쓸데없는 내용으로 회신하지 말라는 의미였던 것 같아. 보통 이런 메일류는 회신이 불가능하니까 저런 문장이 적혀 있잖아. 디폴트로 적힌 서명 같은 건가 봐."


배를 움켜 잡고 웃으면서도 틈틈이 고찰하며 저런 해명까지 스스로 찾아낸 것은 덤이다.

실로 나는 이날 밤 꽤나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저렇게 계속 틀린 안내만 하는 기관에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래야 사람 사는 세상이지. 실수도 좀 하고 헛소리도 하면서 사는 거지."


다음 날 내 회신에 대한 답장은 오지 않았다. 꼭 재촉한다고 되지 않는 게 스페인이라 나 역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메일의 마지막 엄숙한 문단 끝 그 모든 내용을 뒤엎는 '이 메일에 회신하지 마시오'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젖히며 깔깔깔 웃는 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지난 화요일 백신을 접종했었는데 이렇다 할 이상반응이 없던 나였기에 혹시 부작용이 '쓸데없이 실실 웃기'인가 싶을 정도로 메일을 생각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사회보장기관에서의 새로운 회신은 금요일 아침에 왔다.


귀하의 요청에 따라, 그리고 보내주신 서류에 의거하여 우리는 A 정보 업데이트를 처리하였으며 귀하의 A 정보는 저희 기관 데이터베이스 상에서 업데이트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상하게 이번 메일 끝에는 '이 메일에 회신하지 마시오'라는 엄숙하고 굵은 대문자 문장이 없다. 빠르게 잘 처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답장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다 또 한 번 이전 메일의 진지하면서도 엉망진창이었던 내용이 떠올라 이 글을 적는 지금도 웃음이 난다.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요즘 브런치를 이전보다 자주 들르진 못하지만 그래도 댓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에 댓글 달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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