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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Oct 02. 2021

스페인 주4일제 근무, 정말 좋기만 할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올 상반기 한국과 세계의 이목을 끈 스페인발 뉴스가 있었다. 무려 '세계 최초' 타이틀을 내세운 주4일제 근무 도입이다. 주5일 9to6 근무(사실 이것만 지켜져도...)경험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인생 이렇게 일만 하다 끝나는 건 아닌가 고민해봤을 것이다. 출근길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저 차에 치여서 병가를 얻을 수만 있다면 내 다리뼈 한쪽 정도는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나 어쩌다 평일 낮 시내나 백화점 근처라도 지나갈 때면 '아니 나 빼고 다 인생 즐기고 있었네!' 생각한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4일제'라는 단어는 얼마나 달콤한가. 게다가 그걸 처음 도입하겠다는 나라가 태양과 축제의 나라 스페인이라니, 역시 노는 것 하나만큼은 세계 1등이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오늘(10.1) 스페인 대기업 중 처음으로 텔레포니카(Telefonica)가 주4일제 근무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부 직원들은 주5일 40시간 근무 대신, 주4일 32시간을 근무하게 된다. 보통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근무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새로운 근무제가 처음 도입된 오늘이 금요일이기 때문에 이를 신청한 직원들은 당장 오늘 출근을 안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주4일제를 신청했을까? 텔레포니카에서 자발적 주4일제를 신청한 직원은 153명이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비율로 다시 설명할 수 있겠다. 전체 1만 8천 명 직원 중 단 0.8%에만 해당되는 인원이다. 이쯤 되면 스페인 사람들이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일에 미쳐있는 워커홀릭이라든가 아니면 떠먹여 줘도 못 먹는 바보 천치들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니 회사와 정부가 주 4일만 근무해도 된다는데 왜 주5일을 근무하겠다고 우기는 것일까? 사실 물건을 살 때나 계약서를 볼 때 언제나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할 건 큰 글씨가 아니라 작은 글씨이다. 주 4일제 근무가 정작 직장인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작은 글씨 때문이다.


단, 월급도 깎입니다.


오호통재라. 돈은 그대로 주고 일은 조금만 하라는데 싫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겠지만 일 조금 하는 대신 돈도 조금 준다고 하면 누군가의 입장에선 강제 휴식이 될 수도 있다. 텔레포니카는 주4일제 근무를 하는 직원 월급의 16%를 삭감하기로 했다. 근무시간은 20% 줄어들지만 회사에서 보조금을 지급해 월급 삭감폭은 16%로 방어하는 나름 배려를 해준 셈이다. 여기까지 읽은 직장인이라면 다들 직감적으로 일을 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지 일의 양 자체는 크게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일 것이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한 직원이 4일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5일 동안 한다면 달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늘 100%의 컨디션으로 100%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스페인처럼 일하는 중간중간 옆자리 동료랑 스몰톡도 좀 해야 하고, 커피타임도 가져야 하는 직장 문화를 가진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월급이 16% 삭감되는 건 단순히 매월 받는 돈이 줄어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월급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퇴직위로금, 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 혜택 금액 또한 달라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오랜 기간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가계 경제에 영향을 끼친다.


한편 주4일제가 막상 스페인 직장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느 나라, 어느 조직에서나 적용되는 '튀어서 좋을 건 없다'는 명제 때문일 것이다. 텔레포니카 직원에 빙의해 생각해보면 당최 저 0.8%에 껴서 좋을 게 없어 보인다. 절대 다수인 99.2%의 동료 직원들에게 '쟤는 주4일만 일해도 되는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는 시선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이나 '일이 많이 없는 사람'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텔레포니카는 주4일제 근무 신청 대상에서 매니저급 이상은 제외했었다.


게다가 금요일에 쉬기 위해 빡세게 주4일을 근무해야 한다면 오히려 주4일제 도입으로 노려보고자 한 '지속가능한 노동'이 아니라 단시간에 사람을 갈아 넣는 노동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쉬는 금요일에 다른 직원들의 연락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겨 결국 쉬는 게 정말 쉬는 게 아니게 된다면...? ...더이상 과몰입하지 않아도 이미 직장인이라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백번 공감하고 남을 것이다. 


실상이 이렇다 보니 주4일제가 악용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회사가 직원에게 과도한 생산성을 강요하며 주4일제를 도입한다면 근무시간 축소에 따라 인건비도 아끼고, 무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시설비와 유지비를 절약하는 효과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세히 따지고 보면 오히려 직원보다는 회사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여지가 많은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정책을 제안하고 추진한 정당에서는 '세계 최초 주4일제 도입' 타이틀을 등에 업고 한껏 기분을 낸 반면, 정작 그 정책을 적용받는 근로자들은 그다지 반기고 있지 않은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시도가 무의미하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재 전 세계 대중음악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인 빌리 아일리시는 홈스쿨링을 받았다. 현 교육제도는 지난 세기 산업화 시대에 맞는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부모의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매일 일찍 등교해 오랜 시간동안 시험만 마쳐도 다 까먹을 지식을 배워야 했던 이유는 지식 자체보다도 훈련에 있었다는데 공감한다. 지금의 근로 체계에도 분명 이미 지난 세기에 맞추어진 채 이어진 부분이 있을 것이고 지금의 스탠다드 역시 절대 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주4일이든, 주3일이든 논의되고 실행되는 건 가치 있다고 본다. 다만 그런 과정에서 특정 정당이나 정치권의 기분 내기 식의 정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소문만 무성하던 스페인의 세계 최초 주4일제 근무가 정말 시작되었다. 부디 악용되지 않고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수정되며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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