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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Oct 19. 2021

초록 공원이 가득한 도시에 산다는 것

마드리드 살이의 즐거움

처음 만난 유럽은 파리였다.

그리고 그 도시 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은 에펠탑도 센강도 노트르담 성당도 아닌 이름 모를 공원이었다. 촘촘한 초록 잔디 위에는 노란 낙엽이 떨어져 있었고 파란 하늘 위에 흰 구름이 뜨문뜨문 떠 있던 날이었다. 고전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의 아이가 깔깔거리며 잔디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니, 그러니까 저런 풍경이 영화가 아니었단 말이지?

호텔 앞 뤽상부르 공원에서는 연두색의 철제 의자에 앉아 분수의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던 단정한 노인을 만났고 책을 읽는 모습이 왠지 멋있던 여인도 보았다. 그들 옆에는 자연스럽게 뒤섞인 모습이 되려 가지런한 꽃들이 가득했다. 머나먼 한국에서 막 도착한 여행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들은 시간의 여유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두 소유하고 향유하는, 그야말로 눈물 나게 부러운 대상이었다.


이후 마드리드에 살면서도 가장 자주 행복을 느꼈던 공간은 단연 공원의 잔디 위였다. 이 도시에는 무척 많은 공원들이 있어서 철마다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다. 봄이면 벚꽃을 닮은 아몬드 꽃나무를 만나러 낀따 데 로스 몰리노스(Quinta de los molinos) 공원을 간다. 여름에는 더워서 공원을 많이 가지는 않는 편이긴 하지만 해가 진 뒤 가는 후안 까를로스 1세(Juan Carlos I) 공원이 좋다. 가을에는 모든 공원들이 다 아름다워 매주 다른 데를 가도 다 못 즐길 지경이다. 주말에만 개방하는 옛 공작 가문 소유의 엘 카프리초(El Capricho) 공원도 가야 하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용한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후안 파블로(Juan Pablo) 공원도 좋다.


마드리드 레티로 공원의 어느 오후


사시사철 가도 좋은 공원들도 많은데, 대학가 근처에 있어 학생들과 함께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재미가 있는 오에스테(Oeste) 공원은 그중에 우리가 제일 자주 가는 곳이다. 이곳은 크기도 크지만 나무도 많고 경사도 제법 있는 편이라 공원만 걸어도 마치 트래킹을 하는 기분이 든다. 노을이 지는 풍경이 멋진 데봇 신전(Templo de Debod) 주변 공원도 많은 마드리드 사람들이 찾는 휴식 공간이다.


이렇게 많은 공원들 중 가장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공원은 그래도 역시 레티로(Retiro) 공원이다. 원래 왕실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궁전이었던 이곳은 마드리드 시내에서 가장 땅값 비싼 동네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그 크기가 무려 118헥타르이다. 보통 축구경기장을 1헥타르라고 하니, 축구장이 118개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시내 부촌 옆에 이렇게 큰 크기의 공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마드리드 사람들이 얼마나 공원에 진심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큰 크기만큼 레티로 공원 안에는 별의 별게 다 있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의 별도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크리스탈 궁전, 마드리드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는 나무, 각종 조각상들과 노점 카페, 그리고 무엇보다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배 한 척 빌리는 가격도 1만 원이 채 안 해서 그 배를 타고 유유자적 떠다니다 보면 그 옛날 귀족이나 선비들의 신선놀음이라고 이렇게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배 안에서 보는 시점은 이러하다


공원이 이렇게 많기도 하지만 마드리드의 날씨 또한 공원에서의 시간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우선 건조하여 벌레들이 많이 없고, 매섭지 않은 추위 덕에 겨울에도 햇살만 따사로우면 한낮의 피크닉쯤은 거뜬히 가능하다. 그러니 후안 까를로스 1세 공원 같이 큰 공원들에 가면 1년 내내 매 주말마다 아이들 생일 파티가 열린다. 풍선과 각종 장식들을 나무 사이에 꾸며놓고 캠핑용 테이블이랑 의자를 펼쳐놓고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으면 그곳이 멋진 야외 파티장이 된다. 공원이 워낙 넓어서 그렇게 펼쳐 놓고 놀아도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 공원 안에도 레띠로 공원처럼 호수가 있는데 이곳은 심지어 낚시터로 이용되고 카약 같은 스포츠까지 즐길 수 있으니, 바다가 없는 도시 마드리드라고 서운할 게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느 공원에서나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수영복을 입고 선탠을 하는 사람도 정말 많다.


가을 옷을 입은 오에스테 공원


지난 주말 우리도 여러 공원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쇼핑을 할까, 미술관을 갈까, 근교로 놀러 갈까 하다가도 가을이 내려앉은 마드리드 공원들의 풍경이 보기도 아깝게 아름다워서 도무지 마드리드 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에스테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점심을 먹고 난 뒤 또 슬슬 걸어서 데봇 신전 공원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나무 사이에서 줄을 연결해두고 줄타기를 즐기던 한 무리의 친구들을 보았다. 두 사람은 줄을 타고 한 사람은 내내 뜨개질을 했으며 한 사람은 우쿨렐레를 연주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런 그들을 보다가 철퍼덕 매트 위에 누워 낮잠을 잤다. 황금빛 가을 해가 후광처럼 비추는 그들의 모습이 바라만 봐도 행복해서 우리도 오래도록 벤치에 앉아 그들의 줄타기를 지켜보았다.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순 없다. 나도 다음에는 줄타기를 해봐야지.


도심 속 광장이나 공원의 역할이 중요한 건 도시민들에게 공평한 휴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런 공평한 기회는 도시민들의 삶의 질은 물론 사고에까지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큰돈을 쓰지 않아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많은 이 도시에 살며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새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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