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수 년 전이 일이다. 인도와 네팔을 여행했었다. 지금은 집에서 가만히 누워서도 유튜브만 켜면 온갖 세상 신기한 사람들을 다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인도 정도는 가줘야 '세상에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를 실감하던 시대였다. 유독 나이대가 높은 배낭여행자들이 많은 인도에서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겼던 나도 그땐 특이한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그 여행에서 만난 가장 특이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아니, 사실 만나진 못했고 알음알음 소문을 들었다.
스마트폰 대신 두꺼운 <론니플래닛>이나 <인도 100배 즐기기>를 들고 다니며 다 여행한 도시의 페이지는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뜯어내 버리면서 여행하던 때이다. 2~3일에 한 번씩 한국에 안부전화를 하기 위해선 전화방을 가서 비싼 국제 요금을 내고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러니 그런 소문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으로 입으로 흘렀다. 배낭여행객들은 한 도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여행을 하다 보면 며칠 전 다른 도시에서 마주쳤던 여행자들을 또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여행자들을 통해 이전에 만났던 여행자의 안부를 듣기도 했다. 그렇게 그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도 여러 여행자들을 통해 듣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명이었기 때문에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아마도프랑스인으로 기억나는 젊은 청년들인데 델리에서 북인도로 가기 위해 땅을 '삽질'하고 있더란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미 닦여진 길로 가지 않고(사실 이미 닦여진 길이라 봤자 그저 차들이 많이 지나다녀 다른 곳에 비해선 좀 더 다져진 비포장 도로가 많았다.) 매일매일 갈 길을 삽질하면서 직접 닦고 하루에 딱 닦아놓은 거리만큼만 간다는 것이다. 그 짓(?)을 벌써 몇 주째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현재 구글맵 기준으로 델리에서 북인도 라다크까지 가려면 차로 가도 만 25시간이 걸린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걸렸을지 모른다. 걸어서는 꼬박 9일이 걸린다고 나온다. 그럼 하루 중 8시간을 걷는다고 생각하면 거의 한 달이 걸리는 일이다. 이것도 그냥 가장 빠른 경로로 성큼성큼 걸었을 때의 시간이다. 하지만 저들은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닌 새로운 길을 닦아서 그만큼만 걷고 있다고 하니 몇 주 동안 걸었어도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참 삽질하고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오는 마드리드 (C)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완전히 잊고 있던 이 삽질 청년들이 떠오른 건 며칠 전 마신 내추럴 와인 탓이다. 비가 오는 시내에 가니 할 게 별로 없었고 빗방울이 거세지는 것 같아 근방의 카페로 피신했다. 마침 그동안 궁금했던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이었는데 그새 간판이 바뀌어 스페셜티 커피 & 내추럴 와인 전문점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못 자기 때문에 매번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 가도 어쩐지 다른 음료를 더 자주 시키게 되는 건 함정이다.
오렌지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두 종류를 가지고 왔는데 그중 오렌지 색이 더 확실한 놈으로 골랐다. 사실 이미 빛깔에서 마음에 더 들기도 했지만 '땅에 묻어서 양조한다'는 말에 혹하기도 했다. 와인 강의에서 내추럴 와인은 맛이 아닌 생산 철학으로 마시는 와인인데, 이 말을 다시 말하면 맛은 없다는 뜻이라고 했었다. 확실히 섬세한 맛은 떨어지지만 어떤 내추럴 와인들은 전혀 와인 같이 안 느껴지기도 해서 오히려 와인 맛을 안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내추럴 와인과 함께 한 오후 (C)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이 와인도 그랬다. 누가 와인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면 도무지 와인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 같은 맛이었다. 특히 끝 맛이 매우 독특해서 헤레즈 와인처럼 고소한 견과류 맛이 나기도 하고 그보다는 좀 더 확실히 대추차 맛이 났다. 일부러 나중에 찾아보려고 레이블 사진도 찍어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정보가 거의 없길래 뒤져보니 올해 첫 수확되어 양조된 와인이다. 마드리드 근교 버려진 포도원을 다시 살려내 첼바(chelva)라는 품종의 청포도로 양조했는데, 특이한 건 내추럴 와인의 영감이 된 8천 년 전 조지아 와인 양조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거다. 내부를 밀랍으로 코팅한 바닥이 뾰족한 도자기에 포도즙을 넣고 다시 밀랍으로 밀봉해 땅에 묻어 놓는 방식이다. 이 바닥이 뾰족한 도자기를 크베브리라고 부르는데 꼭 크베브리가 아닌 차피(chapi)라는 이름의 용기도 있다.
차피 앰버 내추럴 와인 (C)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내추럴 화이트 와인은 일반 와인에 비해 포도즙이 껍질 및 줄기와 접촉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색이 오렌지 빛을 띤다. 덕분에 오렌지 와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조지아에서는 오렌지보다는 호박색, 즉 앰버(amber) 와인으로 불린다. 이 스페인 내추럴 와인 이름이 차피 앰버(Chapi Amber)가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량 자동화 생산이 가능해진 편한 와인 양조 시스템을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 두었는데 2021년의 스페인 사람 몇몇은 8천 년 전의 방식으로 '삽질해 가며' 와인을 만든다. 차피를 땅에 묻으려면 진짜 삽질을 해야 하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게 있다면 십수 년 전 나는 땅을 닦으며 걷고 있다는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삽질하네' 생각했는데 차피 앰버 와인 양조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어쩐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비단 전자는 돈이 안 되는 삽질을 하고 있고 후자는 어쨌든 판매를 위한 삽질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후자라고 그 삽질해서 당장 대단히 큰돈을 벌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도를 여행했던 때보다는 좀 더 나이를 먹었고 그만큼 세상에 더 치이다 보니 깨달은 게 있다.
어차피 세상 많은 일은 다 삽질에 불과하다!
적어도 그 여행자들과 차피 앰버 와인 양조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삽질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삽질은 무엇일까. 음, 문득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밤에 졸린 눈을 비비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글을 기어코 쓰고 앉아 있는 게 삽질인가 싶다. 그렇다면뭐 나도 행복한 삽질 하나는 하고 사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