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만성절 휴일이었다. 거리에는 금요일부터 핼러윈 분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녔지만 본래 이날은 축제보다는 돌아가신 가족들을 기리는 경건한 가톨릭 축일이다. 몇몇 해는 나도 스페인 가족을 모신 곳에 성묘를 가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성묘를 갈 때면 보통 꽃과 청소도구 정도를 챙긴다. 안장을 했다면 묘의 모양이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관의 모양을 닮았다. 챙겨간 꽃은 무덤 주변 돌 화병에 꽂고, 청소도구를 이용해 무덤의 상판이나 십자가 등에 쌓인 먼지나 오물 등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한국처럼 많은 준비를 해가진 않지만 묘 주변을 정리하고 잠시 그곳에 머물며 고인을 추억하기 위함은 똑같다.
할로윈 복장을 한 사람들이 보였던 주말의 마드리드 그랑비아 (C)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보통 무덤의 상판에는 돌아가신 분의 성함과 살아계셨던 연도 등이 적혀 있고, '천국에서 잘 쉬세요' '주님과 함께하기를'과 같은 종교적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외 허락된 공간을 꾸미는 건 자유이다. 가톨릭 국가답게 거의 대부분 십자가는 꼭 있는 편이고 어떤 무덤에는 고인의 생전 사진이 걸려 있기도 하다.
물론 스페인에서 죽는 사람이 가톨릭 교인 뿐만은 아닐 테니 유대교인, 이슬람교도인과 같은 다른 종교인들의 무덤도 있는데 이들의 무덤은 같은 공동묘지 내에서도 따로 안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죽은 후 묻히는 땅까지 종교로 나뉘는 걸 보면 조금 아리송한 기분이 든다. 대부분 종교가 내세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죽은 후의 일도 그토록 중요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묘지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자꾸 무덤에 새겨진 고인의 태어난 연도와 돌아가신 연도를 계산하게 된다. 유난히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분이나 심지어 나와 비슷한 해 태어난 사람의 무덤을 보면 어쩐지 더 오래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토록 극명하면서도 희미한 공간에서 생각은 문자화 되지 못하고 느낌으로만 떠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 분들의 묘인데, 90살이 넘은 고인의 묘가 굉장히 흔해서 새삼 '장수국가' 스페인의 위엄을 실감하기도 한다.
문득 '메멘토 모리'를 상기해 보고자 이번 만성절을 맞아 공동묘지를 가볼까 했다. 심지어 마드리드에는 접근성이 좋은, 시내에 가까운 위치에 서유럽에서 가장 큰 크기의 공동묘지가 있다. 하지만 언제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걸 기억하기 위해 굳이 묘지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금세 계획을 바꿨다. 대신 자주 갔던 공원의 안 가본 길을 거닐었다. 주말 내내 내린 비 덕에 하늘은 유난히 파랬고 땅은 말랑말랑했다.
'노필터' 마드리드 가을날 (C)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한국에선 비 온 뒤에 땅 굳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여긴 말랑말랑해!
질척이지 않고 딱 푹신푹신할 정도로만 젖은 땅이 걷기가 좋아 왜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건지 갑자기 궁금해졌다.가을이 완연했고 그걸 증명하듯 단풍이 충만했다. 요 며칠 복잡한 생각에 기분이 계속 좀 안 좋았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자연은 요란하게 티 내지 않고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나는 인간 나부랭이라그런 자연을 보고도 5초간 기뻐하고 10초간 울적했다. 누구가 사는 게 자신 없어지면 '야! 어차피 100년 뒤에 우린 다 시체야'라고 생각하라던데, 그런 말을 듣고도 담대하게 생각 못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살아있는 인간이지 싶다. 산 사람이 수백 년 전 죽은 자에게 길을 묻고자 어제부터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기 시작했다. 지은이도 고인인데, 옮긴이도 고인이라 어려운 고어체가 이해하기에 고역이지만 수백 년 전 삶을 먼저 살아 본 작가의 생각을 만나는 이 가을날이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