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길을 걷다 어깨에 툭 떨어지는 낙엽에 잠시 멈추어 선 적이 있다. 나에게만 느껴졌던 미세한 감각과 소리에도 민감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공기마저 완연한 가을이었다. 갈수록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지는 건 소멸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시간 때문일까. 감각이 예민해진 덕에 이 가을의 아름다움에 그 어떤 지난가을보다 더욱 경탄하며 지내고 있다.
"이제 며칠간 비가 올 거래. 낙엽도 다 져버리겠다."
아쉬움은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고 금요일 오후 동안에만 우리는 1만 8 천보를 걸었다. 가을은 그저 완숙하고 여유롭기만 한데 그걸 다 잡을 수도 수도 없는 사람이 마음만 급한 탓이다. 그래도 부지런한 발걸음 덕에 기대치 못한 선물을 받기도 했다.
"프라도 미술관을 가고 근처에 봐 둔 예쁜 바가 있으니 거기서 간단한 요기를 하자."
계획은 엉성한 듯 철저했고 절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는 게 생이라 프라도 미술관에서부터 긴 줄이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만능 무기라도 쥔 듯 1년 정기 이용권을 펄럭이며 혹시 바로 들어갈 수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오늘은 '전체 무료 개방일'이란다. 그러니 표를 살수도 이용권을 사용할 수도 없으며 무조건 줄을 서서 들어가라고 했다. 급한 마음에 경비와 직원에게 각각 물어봤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먼저 물어봤던 경비가 사무실에 문의를 하러 간 사이 직원은 "원래는 줄을 서야 하지만, 일단 잠깐만 기다려봐."라고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비가 돌아와 "정기 이용권 있어도 줄 서야 한답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바람에 속삭였던 직원은 미안한 듯 어깨만 들썩여 보였다.
우리는 줄의 끝으로 갔고 곧 2시간 뒤 입장이 가능한 표를 받을 수 있었다. 계획은 조금 틀어졌지만 순서가 바뀌었을 뿐, 그럼 요기를 먼저 하고 미술관을 보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기에도 시간이 좀 여유로웠기에 먼저 근처 레티로 공원을 갔다.
"저 나무는 마드리드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인데 벌써 나이가 400살이 넘었다지. 근데 최대 6000년도 산다니, 사실 나무에게는 아직 유년기인 거야."
우리와 다른 생의 주기를 살고 있는 나무를 보며 가을 공원을 유영했다. 공원에서 나오는 길에는 홀로 버스킹을 하던 사람을 마주쳤는데 노래 가사가 너무 슬펐다.
이제 집에 가도 엄마도 아빠도 기다리지 않아. 삶은 끝나가고 있어.
버스킹을 하던 사람이 희끗한 머리의 중년의 남성이었기에 그 노래가 더 절절했을까.
"누구에게나 부모님이 기다리지 않는 집은 노스탤지어의 트리거인가 봐. 오징어 게임에서도 주인공 친구가 죽으면서 이제 해가 져도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안 부른다고 하면서 울잖아."
모든 그리움은 다 유년시절에 갇혀 있는데 산다는 건 그리운 시간과 오히려 더 멀어지기만 하는 일일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평소라면 쉽게 우울해져 버렸을지도 모를 감상이었지만 어제는 마드리드의 가을이 너무 아름다워 부정적인 감상이 껴들 틈이 없었다. 오히려 소란스러운 유년시절과 여름이 다 끝난 뒤 맞이한 이 가을의 차분함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대했던 미술관 근처의 바는 생각만큼 아늑했고 음식은 생각보다 더 맛있었으며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젊은 종업원의 눈은 괜스레 따뜻하고 편안했다. 미술관 예약만 없었더라면 와인 한잔이 아니라 한 병을 시켜서 해가 떨어지는 속도에 맞추어 병을 비워내 버리고 싶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미술관 예약 시간에 맞추어 일어났지만, 진짜 행복은 미술관에서 마주했다. 작품을 감상하는데 자꾸만 박수 소리와 피아노 소리가 들려 그 소리를 찾아갔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배경으로 전시관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에서는 방문객들의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피아노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은 프라도 미술관 개장 202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고 이 덕분에 미술관이 무료 개방한 것이었다. 무료 개방과 더불어 3대의 피아노가 설치되었다. 연주자는 따로 섭외되지 않았다. 방문자 모두가 연주자가 되었다.
<시녀들> 작품을 배경으로 피아노 연주를 들으니 그 호사스러움에 저절로 미소가 흘렀다. 손을 덜덜 떨며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을 연주하던 한 아이 엄마의 순수한 마음도 좋았고 빠른 곡을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연주하던 남자아이의 자신감도 기특했고 둘이서 레너드 코헨 원곡의 <할렐루야>를 어설프지만 끝까지 연주해낸 두 여자아이도 무척 귀여워 박수를 치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호사스러운 미술관을 보고 나오는 길, 조명 켜진 리츠 호텔이 아름다워 늘 하던 농담을 했다.
"저 테라스에 서서 돔 페리뇽 같은 거 말고, 더 비싸고 희귀한 샴페인을 딱 한 모금만 마신 다음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소리칠 거야."
"절대 흥에 겨워선 안되고 신나서도 안돼. 아주 권태롭게 말하는 거야.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수십 번도 더 반복한 그 농담이 웃겨서 권태롭지 못하게 깔깔깔 웃었다. 요즘은 둘 중에 한 명이 좀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아니, 그건 땡땡이 아냐. 그건 땡땡~♪이야'라며 특유의 멜로디를 붙여 되풀이하곤 한다. 그럼 갑자기 심각했던 일도 매우 하찮아진다. 계속 이렇게 삶을 좀 하찮게 여기면서 살자고 이야기해본다. 심각해져서 얻는 건 심각함 밖에 없다고. 이미 충분히 깊고 아름다운 계절이라 사람은 좀 덜 심각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