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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Dec 24. 2021

신조어로 돌아보는 스페인의 2021년

어만큼 세상을 정확히 조명하는 것이 있을까? 언어는 살아있는 시대의 반영이자 지나간 시대의 기록인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결국 언어만이 소통과 계승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는 마치 자연처럼 생겨나고 널리 활용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올 한 해 새로 등재된 신조어를 살펴보는 것은 한해를 반추해보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스페인의 국립국어원 격인 왕립아카데미(Real Academia Española)에서는 매해 전 세계 수백만명의 스페인어 사용자 표본조사를 통해 사전(典) 개정 작업을 한다. 올해의 경우 의미 추가, 변경, 삭제, 신조어 등록 등에 있어 전년 대비 3,836건의 개정이 있었다. 개정된 주요 단어들을 통해 올 한 해 스페인 사회의 주요 이슈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기술 발전과 디지털 경제사회로의 본격 돌입

스페인 사회는 빠르게 디지털 경제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지난해 EU 집행위에서 코로나로 인해 경제 타격을 입은 회원국을 지원하기 위해 조성한 '경제 회복 기금(Next Generation EU)'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는 스페인으로 총 1,400억 유로(약 188조 원), 이중 절반 가량인 약 720억 유로는 상환의무가 없는 보조금 형태로 지원받는다. 2023년까지 집행해야 하는 이 기금의 핵심 추진 방향은 바로 '디지털 경제 전환'과 '친환경 전환'이다. 돈풀기를 통한 일시적 경기 회복이 아닌 기금의 이름처럼 '미래세대(Next generation)'가 살아갈 수 있는 먹거리를 얼마나 만들어 주냐가 이번 예산 집행의 성패를 가를 것이며 그 먹거리의 상다수는 디지털 사회 안에 있다.


이러한 사회 변화를 보여 주듯 이번 스페인어 사전 개정에는 디지털과 관련된 신조어가 많이 포함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비트코인(Bitcóin), 봇(Bot), 사이버 공간 내 괴롭힘(Ciberacoso), 사이버 범죄(Ciberdelincuencia), 암호화폐(Criptomonea), 디지털 기술을 통한 위치 추적(Geolocalizar), 웨비나(Webinario) 등이 있다. 이런 단어들은 이미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들이라 전혀 놀랍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오히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디지털화 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도 된다. 의미가 추가된 단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오디오(Audio)는 디지털 기기로 보내는 음성 메시지를 표현하는 단어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고 공유하다(Compartir) 디지털 기기를 통해 서로 파일 등을 나누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

스페인 유력 일간지 엘 빠이스에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 인구수 대비 레스토랑 수는 세계 1위 수준이라 한다. 츄러스부터 한국에도 잘 알려진 감바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캐비어, 트러플, 푸아그라와 함께 세계 4대 진미라고 주장하는 하몽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과연 먹는데 진심인 나라이다. 그만큼 올해 신조어에서는 음식과 관련된 것도 많았다. 우선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의 대표 음식인 산하코보(Sanjacobo)까초뽀(Cachopo)이다. 산하코보는 햄 사이에 치즈를 넣고 계란물과 빵가루를 묻혀 튀긴 음식이고 까초뽀는 얇게 편 고기 사이에 아스투리아산 치즈와 세라노 하몽을 넣고 튀긴 음식이다. 둘 다 이미 아주 널리 쓰이는 단어이자 대표적인 지역 음식인데 아직까지 음식 이름으로 정식 등록이 안되어 있었다는 점이 오히려 생소하다.


까초뽀, 보통 어마어마한 크기로 나오기 때문에 성인 남성 팔뚝 길이를 훌쩍 넘는 경우도 많다 (출처: flickr)


한편 외국 식재료나 음식이라 뒤늦게 추가된 것도 있다. 퀴노아(Quinoa)끄루디떼(Crudité)이다. 퀴노아는 남미 산악지대에서 재배되던 곡물로 독특한 식감과 풍부한 영양성분으로 몇 년 전부터 각광받는 식재료이고 끄루디떼는 각종 생야채를 길게 썰어 소스와 함께 찍어 먹는 프랑스식 전채요리의 이름이다. 스페인은 영국 찰스 왕세자는 까를로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사벨과 같이 사람 이름까지 스페인어 식으로 변경해 부르는 나라인데, 퀴노아의 경우 새로운 식재료라 그렇다 쳐도, 조리하지 않은 생식을 뜻하는 끄루도(Crudo)라는 스페인어 단어로 대체 가능한 까지 외래어(프랑스어) 표기를 따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쨌든 둘 다 비건 재료나 요리인 점은 최근 스페인에서 불고 있는 비건식 유행을 반영하는 듯하다.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코로나의 영향력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는 여전히 지겹게 우리 사회를 지치게 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단어보다는 코비드(Covid)라는 단어를 훨씬 흔하게 쓰며 이 역시 신조어에 포함되었다. 한편 입을 덮는 사물이라는 뜻의 꾸브레보까(Cubreboca)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마스크의 일상화만큼이나 마스크를 지칭하는 단어도 다양해지는 듯하다. 지난해 지겹게 들었던 소셜 버블(Burbuja social-소수집단을 비눗방울로 비유해 그 안에서만 교류한다는 의미로 지역사회로의 광범위한 바이러스 전파를 차단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 단어)이나 뉴노멀(Nueva normalidad) 역시 코로나가 스페인 사회에 남긴 신조어들이다. 한편, 프랑스어로 선별을 의미하는 단어로 동시 다발한 병자에 대해 긴급도, 중증도를 판별하여 치료자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의미를 가진 트리아지(Triaje)도 신종 외래어 단어에 포함되었다. 이미 의료계에서는 쓰이던 단어이지만 이번 사전 개정판에 포함되기까지 작년과 올해 얼마나 많은 긴급 상황 속에서 의료진이 사투를 벌였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6억 인구가 사용하는 스페인어의 다양성

스페인어는 과거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 그리고 미국 일부 지역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스페인 왕립아카데미 발표에 따르면 그 수가 약 6억 명에 이른다고 하니 정말 어머어마하다. 사는 대륙, 인종, 역사, 문화, 경제 등등 모든 면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만큼 나라나 지역마다 차이가 없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어 사전을 보면 'ㅇㅇ국가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라는 전제가 붙은 경우가 많다. 이번 사전 개정 조사 역시 스페인뿐만 아니라 여러 국가의 스페인어 사용자의 언어 사용까지 조사해 반영하였다.  


그중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 어디에서나 인기가 높은 스포츠 축구와 관련된 단어가 눈에 띈다. 축구화를 스페인에서는 축구용 신발이라는 뜻의 보따스 데 풋볼(Botas de fútbol)이라고 비교적 평범하게 부르는 반면, 칠레에서는 슛을 날린다는 뜻의 추떼아도르(Chuteador)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축구화 외에도 축구선수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축구에는 슛을 날리는 동작 말고도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유독 '슛을 날린다'라는 의미에 집중한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니 칠레가 공격 축구를 구사하는지 궁금해진다.


여행도 사랑도 빼놓을 순 없지

마지막으로 스페인 왕립아카데미가 제공하는 온라인 사전에만 추가된 신조어들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포도원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 스페인답게 와인 산지를 방문해 와인을 맛보며 즐기는 여행(Enoturismo)도 그중 하나이다. 단어 하나만으로 그 나라의 관광상품까지 엿볼 수 있다니 역시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라는 점을 실감케 한다.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지은 호텔이 있는 리오하 지방의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 (출처: Marques de Riscal)


그런가 하면 스페인의 올해 최대 사회 이슈 중 하나였던 성(性)적 자기결정권이나 신념과 관련된 신조어들도 여러 개가 있다.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하는 비독점 다자연애를 뜻하는 폴리아모르(Poliamor), 태어난 고유의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트랜스젠더(Transgénero)와 생물학적 성별과 정체성이 같은 사람을 뜻하는 시스젠더(Cisgénero) 그리고 범성애(Pansexualidad)라는 단어들이다. 시스젠더의 경우 트랜스젠더와 대비해 '일반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로 스페인에 앞서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2015년 등록된 바가 있다.


범성애는 성별 구분 없이 한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개념인데 양성애와는 구분된다. 양성애는 성별을 인식한 상태에서 그 성별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범성애는 성별 인식과 무관하게 사랑한다. 쉬운 예로 넷상으로 성별을 밝히지 않은 사람과 소통하다 사랑에 빠진 뒤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가진 성별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 것이다.


스페인 왕립아카데미가 발표한 주요 신조어로 돌아본 올 한 해 스페인 사회의 최대 화두는 디지털, 먹거리, 코로나, 그리고 더욱 다양해진 사랑이었다.

얼핏 안 어울리는 것 같은 단어들의 나열 같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리 코로나라는 변수가 기승을 부린다 한들 사회와 기술은 발전하고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보다 맛있는 음식과 보다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을 찾으며 살아간다는 결론이 묘하게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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