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루나 Nov 08. 2021

아무튼 칵테일

홀로 또 같이 어쨌든 좋은

일요일 밤, 진토닉을 말았다. 어쩐지 진토닉을 '만들었다'라는 표현보다는 '말았다'는 표현을 좀 더 좋아한다. 가니쉬로 가장 선호하는 건 얇게 저민 오이지만 보통은 그때그때 집에 있는 걸 넣는다. 오늘은 만다린과 시나몬 스틱을 곁들였다.


진토닉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이다. 깔끔한 맛도 좋지만 가니쉬에 따라 달라지는 풍미 덕에 매번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매력적인 술이다. 복잡한 레시피 없이 진, 토닉워터, 가니쉬만 있으면 돼서 직접 만들어 마시기도 좋다. 황금 비율이 있다고는 하나 집에서 마실 때는 그냥 눈대중으로 대충 섞어 마신다. 오렌지 껍질 하나도 연금술을 부리듯 화려한 묘기를 하며 넣어준 바텐더가 만들어준 진토닉에 딱히 떨어지지 않는 나름 손맛 좋은 진토닉이다.


아무튼 진토닉 (C) 2021, 이루나, All rights reserved


마드리드에는 진토닉만 전문으로 하는 칵테일 바가 하나 있는데 이 술을 마실 때면  늘 그곳의 추억이 생각난다. 벽면에 각종 가향을 한 진들이 가득해 주문하는 대로 골라서 맛있게 말아준다. 이곳에는 수요일 퇴근 후 가는 걸 가장 좋아했다. 너무 이른 요일이 아니라 적당히 사람이 있었고 그렇다고 너무 주말은 아니라 자리다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항상 여자 지인들과 같이 갔고 테이블이 아닌 바텐더 앞 좌석에 앉는 걸 좋아했다. 남자 바텐더라고 해봤자 대부분 이성이 아닌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에 불순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칵테일을 만들어내는 화려한 몸짓을 보는 걸 좋아했고, '퇴근 후'라는 전제를 좋아했고,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어우러지는 내 모습을 좋아했다. 그때는 그 맛에 회사를 다닌다고 할 정도로 그 순간이 좋았다. 어쩌면 고등학교 때 봤던 미드 '앨리 맥빌'의 부작용이 그때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로펌의 변호사가 아니었고 앨리처럼 깡마른 몸과 금발을 가지진 않았지만.


한 번은 그곳에서 여자 지인 한 명과 각각 3잔의 진토닉을 마셨는데 첫 번째 잔은 첫 번째 잔이라고 서비스로 받았고 두 번째 잔을 계산하고 나니 세 번째 잔은 다른 진을 마셔보라며 또 서비스로 받았다. 그런 기대치 않은 이벤트도 그 칵테일 바를 가는 재미였다. 우리 둘은 깔깔대며 한층 상기된 발걸음으로 '마드리드 최고의 칵테일 바'라고 구글이 알려준 곳으로 2차를 갔다. 그곳에는 어느 정도 취한 상태로 들어갔기에 여자 바텐더와 함께 거의 친구가 되어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이야기들로 깔깔거렸다. 호기롭게 제일 낯선 이름의 칵테일을 두어 잔 시켰고 또 두어 잔은 서비스로 받았으니 그날이 정말 칵테일 인생에 제일 재밌고도 힘들었던 날이었다.




아무튼 칵테일은 추억이 많다. 스무 살 대학 동기들과 피처로 마셔대던 요구르트 소주도 칵테일이라면 칵테일이었겠지만 실제로도 그 무렵부터 칵테일을 꽤 자주 마시긴 했다. 그땐 종로가 주무대였다. 그냥 길을 걷다 칵테일이라고 적힌 바에 들어가 굉장히 널찍하고 한적했던 바에 앉아 동기와 같이 피냐콜라다롱아일랜드아이스티, 모히또 같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의 술들을 마셨다. 여전히 한국에 갈 때면 서로의 술친구가 되어주는 오랜 중학교 친구와도 그 무렵부터 종종 칵테일을 마셨더랬다.


연애 때도 가장 자주 마시던 술은 칵테일이었다.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매주말 같은 바에서 1L짜리 대용량 테킬라 선라이즈를 나눠 마셨다. 이때 인생에서 마셔야 할 데낄라 선라이즈의 총량을 다 마셔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 이후로는 그도 나도 더 이상 마시지 않는 칵테일이 테킬라 선라이즈이다. (괜히 분위기가 심각해지지 않기 위해선 이 뒤에 웃는 이모티콘이라도 넣어야 할 것 같은데 이모티콘 있는 글을 좋아하지 않아 이런 구구절절한 문장으로 대신한다.)


함께 칵테일을 마셨던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소중한 친구도 있고 인생의 동반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제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싸웠던 것도 아닌데 그냥 인연의 시절이 끝나 그렇게 되어버렸다. 어떤 이는 살아보니 친구는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며, 쓸데없는 술자리에서 너무 시간을 낭비했다고 지만 흘러가버린 시절 인연을 보면서도 그 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제 끊겨버린 인연들과 칵테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고, 또 술자리 이야기는 잊어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기도 해서 굳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함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진토닉을 연거푸 마시고 돌아오던 어떤 밤에는 이제 그만 콱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했던 날도 있었다. 그들과 마시던 칵테일들은 다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이 밤 홀로 글을 쓰며 진토닉을 마셔도 그 모든 추억과 함께 마시는 기분이 든다.


그 추억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가니쉬를 곁들여 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을까. 그런 상상은 너무 슬프고 끔찍하다. 오늘 밤 이 한잔의 진토닉이 더 맛있는 건 분명 그 시절 그 인연들 덕분이다. 그러니 미래의 시절 인연이 또 칵테일을 마시러 가자면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곳에서 크게 웃을 것이고 웃은 다음에 잊을 것이고 그 행복한 감정만 기억해 언젠가 다시 홀로 칵테일을 마는 밤, 가니쉬와 함께 그 기억도 슬쩍 칵테일 안에 밀어 넣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3만 5천 명이 읽는 글을 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