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게의 밤은 코골이 오케스트라 공연장 같다. 나는 알베르게에서 자기 이전에는 그렇게 다양한 코골이 소리가 존재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제각각 다른 높낮이와 리듬으로 밤새 울리는 코골이 소리에 잠 못 이루던 어느 밤에는 듣다 듣다 지쳐 피식 헛웃음이 다 나기도 했다. 이어플러그를 껴도 들리는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해 내가 발견한 방법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다소 크게 틀어놓고 자는 것이었다. 아무리 듣기 좋은 음악이어도 큰 소리에는 못 자는 나였지만 음악 소리가 코골이 소리보다는 절대적으로 아름다웠으므로 순례길에서는 매일 밤 그렇게 자곤 했다. 그렇게 하루는 잔잔한 랜덤 발라드를 틀어 놓고 잤는데 새벽에 너무 추워 잠에서 깬 내 귀에 울리고 있던 노래가 있었다. 아이유의 <안녕 봄 안녕>이었다.
봄, 그대가 내게 봄이 되어 왔나 봐 따스하게 내 이름 불러주던 그 목소리처럼
아이유 <봄 안녕 봄> 가사 중
차가운 공기를 피하려 침낭 안으로 몸을 웅크리며 저 노래를 들은 그 새벽 이후, 이 곡은 내가 순례길에서 가장 자주 들은 곡이 되었다.
프로미스타에서 잠시 순례를 포기하고 마드리드 집에서 3박 4일을 쉰 뒤에는 폰페라다라는 마을로 돌아갔다. 먼저 걷던 독일 친구가 폰페라다로 도착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팜플로나에서 순례를 시작한 뒤 딱 하루 빼고는 내내 비바람이 부는 추운 날이 계속됐는데 폰페라다날씨는 굉장히 온화했다. 게다가 이미 한번 순례길을 걸어본 순례자들이 증언한 대로 폰페라다부터는 길과 풍경이 무척 아름다워 거기에 취해 걷다 보면 힘든 생각도 안 들 정도였다.
폰페라다 근처의 작은 교회당 (c)이루나
그새봄이 완연했다. 이제 순례도 막바지로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부터 곧 순례자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었다. 나처럼 혼자 온 순례자들에게 그 길은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조차 그 시간이 이미 꿈결인 듯 그리워지곤 했다. 설사 다시 만나더라도 지금처럼 순수한 마음을 나누기 힘들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길 밖의 삶은 서로가 모두 다르고 바쁘고 또 신경 써야 할 일들이 걸어야 하는 것 말고도 너무 많이 있으니까.
특히 갈리시아부터는 모든 게 다 그리움이었다.
길이 끝나가는 아쉬움.
더욱 다가오는 헤어짐.
보기도 아까운 풍경들.
봄이 느껴지던 순례길의 풍경들 (c)이루나
헤어지는 일에 왜 익숙하지 않을까.
벌써 외국생활도 12년 차가 되었다. 그동안익숙해진 게 있다면 바로 헤어짐이다. 일단 외국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익숙한 이들의 곁을 떠나는 일이었다. 가끔 앞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면 겁이 덜컥 난다. 일 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보아도 너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이다.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날 숫자는 그보다도 더 적겠지. 이곳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대부분 잠깐 머물다 돌아갔다. 미처 더 깊은 우정을 쌓지 못한 채, 쉽게 연락할 수도 없는 그리운 마음만 남기고 가버렸다. 그래서난 늘 해결하지 못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았다.
이제는 그런 감정들은 많이 무뎌졌다. 무뎌져야 해서 그랬고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라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다만 그래도 유독 그리움이 크게 느껴질 때면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할 투정 대신 고마운 마음을 떠올려 본다. 지금도 그리울 만큼 내게 따뜻했던 이들이다. 그때의 나는 분명 그 미소와 온도 덕에 행복했을 것이다.
돌아간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봄이 완연했다. 그래서 포근한 바람이 불면 그리운 이들의 안부 인사인 듯 대답해보고 흐드러진 꽃나무도 아름다운 얼굴인 듯 오래 보았다. 내게 봄 같은 사람들의 흔적이 길에 가득했다. 남겨질 그리움이 두렵다고 다가오는 아름다운 봄을 피할 수 있을까. 봄이 지나도 그 봄의 기억으로 오래 따뜻할 나의 가을을, 나의 겨울을 용기 있게 기다리기로 한다.
봄, 그대가 내게 봄이 되어 왔나 봐 가득 차게 두 뺨을 반짝이던 편한 웃음처럼 아마 잘 지낸다는 다정한 안부인가 봐 여전히 예쁘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