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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Jan 08. 2021

포근포근 눈이 내리는 날의 뵈프 부르기뇽

마드리드에도 눈꽃이 피던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아직 하얗지 않았다. 눈을 기다리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므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눈 소식이 주말까지 계속 있었으므로 며칠은 큰 빨래를 하지 못할 것 같아 이틀 전 침대 시트를 다 빨고 하얀 새 시트로 바꾸어 두었다. 아직 세탁세제 향이 남아 있는 침대에 누워 별로 바쁠 일이 없는 아침을 맞이했다.




오전 11시 무렵 다시 창밖을 보니 그새 눈이 내리기 시작해 세상이 이미 하얘져 있었다. 눈은 꽤 많이 내리고 있었지만 기대했던 함박눈이 아닌 송이가 작은 눈이었다. 눈송이가 작고 가벼워서 느릿느릿 포근포근 내리고 있었다. 문득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따뜻한 뵈프 부르기뇽이 먹고 싶어 졌다. 마침 집에는 딱 한 잔씩 정도 남아 있던 레드와인도 두 종류나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이리도 도톰한 눈꽃을 보다니


패딩을 꺼내 입고 운동화 대신 오랜만에 등산화를 신었다. 오랜 장갑도 꺼냈다. 분홍색 벙어리 털장갑은 스무 살에 친구와 맞춰 샀던 것인데 어찌하여 스페인까지 건너와 여즉 집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서랍에서 가장 먼저 찾은 장갑이었으므로 잠시 이 장갑을 끼던 예전 겨울을 떠올리며 손을 넣었다.


부러 다소 먼 마트로 걸어갔다. 인도는 염화칼슘을 미리 뿌려 놓아 눈이 쌓이지 않았지만 펄펄 내리는 눈에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눈꽃이 피었다. 인도 옆 잔디나 공터들에는 눈이 쌓여 있어 뽀드득 눈도 밟아 보았다. 뒤집어쓴 패딩 점퍼의 모자 양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에도 덩달아 눈꽃이 피어갔다.


소고기와 샐러리, 당근, 샬롯, 오렌지와 같은 뵈프 부르기뇽 재료를 사서 다시 돌아오는 길, 산책 나온 많은 강아지들과 마주쳤다. 강아지들 발은 염화칼슘을 밟으면 타는 것 같이 아프다던데, 신발을 신은 강아지가 없어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집에 도착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니 눈썹과 속눈썹에도 눈이 매달려 있어 뻘하게 웃음이 터졌다.


눈 내린 풍경과 강아지들




뵈프 부르기뇽을 다 만들고 나닌 오후 4시가 되어버렸다. 밖은 여전히 포근포근 눈이 내리고 있었고 세상은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접시에 담아와 눈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는다. 평소에 잘 먹지도 않았던 이 요리가 왜 굳이 먹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느리게 떨어지는 하얀 눈을 바라보며 먹는 따뜻한 뵈프 부르기뇽이 썩 어울리는 오후였다. 오렌지 필을 좀 과하게 넣었는지 오렌지 향이 너무 압도적이었던 건 약간 실패였지만.


포근포근한 날의 뭉근한 뵈프 부르기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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