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휴지를 샀다

스페인 거주자의 코로나 기록

by 이루나

3월이 되고 자주 마트에 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거나 의식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나도 모르는 생존본능이 아니었나 싶다.


평소 냉장고를 꽉 채워놓고 사는 스타일이 아니다. 오히려 냉장고가 비었을 때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타입이다. 그럼에도 거의 매일 산책 겸 마트에 가서 무언가를 사 왔다. 고기와 해산물을 사 와 냉동실을 채웠고 물과 우유와 쌀과 파스타를 샀다.


하루는 외려 한국의 외신에서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 나라에서 휴지 사재기가 일어나 동이 났다는 소식을 보았다. 매일 마트를 갔지만 딱히 사재기라 할만한 걸 본 적은 없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생필품도 쌓아놓고 사는 스타일이 아닌데, 뉴스를 보고 나니 때마침 휴지가 거의 다 떨어졌길래 오늘은 휴지를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마트에 갔다.


그런데 휴지가 없었다. 휴지뿐만 아니라 키친타월, 냅킨도 없었다. 휴지가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걸 보고 황당해서 사진을 몇 개 찍고는 다른 마트로 갔다. 역시나 휴지는 없었다. 그곳은 더 심하게 비누나 세정제 같은 것들도 없었다.


휴지 사재기의 원인은 인터넷 발 루머 때문이라고 했다. 마스크와 원자재가 같아서 마스크를 생산하느라 생산을 못하고 있다고, 그래서 가격이 오를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돌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마트에 갈 때마다 사람들 카트에 휴지가 좀 많이 보이긴 했던 것 같다. 그 루머를 믿진 않았지만 어쨌든 정말 집에 휴지가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휴지를 살 수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 잡히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정 못 사면 그냥 물로 씻으면 되지(!)라는 패기 있는 생각도 했지만 진짜 속마음은 휴지가 너무 사고 싶었다.


그 날이 다가올수록 마트에서 품절되는 것은 휴지만이 아니었다. 우유, 모든 신선식품, 파스타... 아니 그냥 모든 게 다 사라져 갔다. 고기 코너에는 모든 종류의 고기가 다 사라지고 푸아그라만 한두팩 정도 남아 있었다. 문득 그동안 음식을 많이 사둔 게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이 돌았다. 곧 외출금지가 시행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외출금지라니? 우한처럼?


3월 8일 여성의 날 이후, 확진자는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폭증하기 시작했다. 마스크도 없이 서로 얼싸안고 소리 지르며 여성의 날 가두행진에 참여했던 여성 정치인들을 필두로 부총리며 장관이며 정치권 인사들이 자가 격리되고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기 시작했다. 책임을 묻는 질문에 '우리는 WHO의 권고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당시 WHO는 증상이 없다면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3월 14일 코로나 확산 저지를 위해 스페인 전국에 국가비상령이 선포되었다.


그 전날 선포 논의 뉴스를 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역시 마트에 가는 일이었다. 좀 더 많은 물과 좀 더 많은 음식과 어쩌면 있을지 모르는 휴지를 찾으러.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사지 못했다. 이미 그냥 마트 전체가 다 텅 비어버렸다. 게다가 더 당황스러웠던 건 불과 며칠 전과 달리 꽤나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상당히 비싸고 좋아보는 마스크도 있었다. 마스크가 없는 사람들은 대신 스카프로 입과 코를 막기도 했다. 중국인들이 다 사가서 품절이라며? 언제 다들 마스크를 산 거지?


마스크도 못 샀는데 휴지마저 못 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차를 몰고 백화점으로 갔다. 이미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텅 빈 도로 위 전광판에는 '안전을 위해 집에 머무십시오'라는 문구가 번쩍였다. 보통이라면 지하주차장을 이용했겠지만 백화점 앞 정차구역 역시 텅 비어 있었기에 그냥 외부에 차를 세우고 백화점 내 마트로 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휴지가 꽤 남아 있었다. 음식도 일반 마트보다는 훨씬 많았다. 평소 사는 양보다 3배쯤 많은 식료품과 생필품, 그리고 무엇보다 휴지를 샀다. 너무나 사고 싶었던 각비누도 살 수 있었다.


백화점을 나와 트렁크에 그 짐을 채우고 있는데 우리 옆으로 텅 빈 도로를 가르며 다가온 경찰차의 메가폰 소리가 들렸다.


"안전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