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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Park Mar 21. 2019

Jay의 인생 후반전 도전 스토리

좌충 우돌 캐나다 영주권과 취업 도전기

올해로 한국 나이로 51세인 나는 인생을 축구경기에 비유하자면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에 있다. 아니, 그 보다는 후반 20분 쯤 남은 시점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선수일까? 혹자는 전, 후반 경기를 모두 마치고 연장전에 서 있는 선수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시점에 있든지 사실 난 상관이 없다. 두발로 걷고 뛸 수 있고 경기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 전반 50세를 돌아보면 길면 길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세상에 나와 이제까지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고 나름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고 세상 구경을 했던 시간과 아들 셋을 둔 가장으로서의 생계에 대한 책임감도 무겁지만 그래도 살아 볼 만한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나를 소개하자면 작년 6월에 캐나다로 건너 와 지금 (2019년 3월)까지 9개월 동안 Alberta 주 록키산맥의 Banff National Park 근처의 캔모어(Canmore)라는 작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일식/한식 음식점 조리사로 일하고 있다. 사랑하는 처와 세 아들들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나는 역기러기 아빠로써 가족 모두들 나의 영주권 취득에 기도와 성원을 보내오고 있다.

* Canmore- Three Sisters Mountains (가게 뒷문을 열고 나가면 이렇게 눈덮인 산이 앞에 펼쳐져 있다)


나의 캐나다 영주권 도전기는 십년이 넘는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나눌 수는 있으나 2018년 6월 캐나다에 입국 전, 2017년 캐나다로 오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와 이후부터 좌충우돌 도전 스토리를 써 나가고 싶고 현재도 진행 중인 나의 이야기를 통해 혹시라도 이민에 대해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분들이나 현재 진행 중인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간을 쪼개어 나누고자 한다.


잠시 2017년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일찌기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Computer Science(전산학과) BS 학위를 취득 (1995년) 했고 20년 가까이 IT 업체에서 근무를 했었다. 2017년 10월 호주의 IT회사로 취업이 확정이 되어 꽤 괜찮은 연봉을 받고 취업 비자를 취득하였고 영주권 스폰서까지 회사가 지원하는 조건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었다. 그동안 근무했던 회사도 모두 그만 둔 상태였다. (지나서 보면 모든게 확정되기 전에 섯불리 회사를 그만 둔게 내 인생에 있어서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드디어 호주로 출발하려고 대기 하던 때였는데, 회사에서 부담하기로 했던 호주행 비행기표가 제촉을 해도 도착하지 않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어오던 차, 갑자기 출발 나흘 전에 회사의 부사장으로부터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


회사가 지금 어려운 상태라 부득이 나의 고용을 파기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 지고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전화를 받은 시각, 옆에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같이 계셨었다. 입 밖으로 "나 잘렸어요" 라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으나, 매도 일찍 맞자고, 그냥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와 나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고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었다.



집에 와서 와이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내 자신이 너무 싫고 자존심도 상할 데로 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떻할 건가? 와이프에게 얘기를 하고 머리를 맛대어 보았으나 당장 생계가 걱정이 되었다.

그만 둔 회사는 이미 몇년이 지났고, 호주에 가서 프로그래머로 일할 것이라 생각하고 IT 업체는 그만 두고 그 동안 내가 좋아하는 쿡(Cook) 일을 지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일을 했었지만 다시 돌아가서 일을 하려니 힘들었다.


고심한 끝에 며칠 후 같이 다니던 요리학원의 같은 조에서 일하던 후배가 운영하던 일식집에 연락을 해 보았고 장사가 잘 안되어 주방장도 없는 차에 주방에서 같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니 일을 하자고 했다. 보수는 후배 레스토랑이 그리 잘 되는 음식점이 아니다 보니 조금 밖에 받지는 못했으나 다른 방도가 없어서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기로 하였다.


후배 레스토랑에서 받는 급여는 우리 다섯 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고, 내 은행의 마이너스 통장 잔고는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봐도 이렇게 해서는 빚만 지는 인생이 될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 세명을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뼈져리게 느낀 시간들이었다.


부족한 생활비를 매꾸려고 밤에는 대리기사 일도 했는데 대리기사란 직업의 특징이 손님 콜을 받으면 빨리 이동해야 하고 늦게 도착했다는 둥 싫은 소리를 안듣고 한 콜이라도 취소되는 걸 피하려면 빨리 도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부러 건강을 위하여 걷고 러닝하는 것은 좋지만 직업으로 하자니 너무 힘들었다. 새벽 3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오기가 일쑤였고, 대리기사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한 매일 손에 쥐는 돈은 현금 10만원 안팎이었다.


대기업에서의 넉넉한 봉급으로 생활하던 나에게 100원의 씀씀이도 아깝게 느껴졌었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빠의 이런 무 능력한 모습을 보여 주는게 너무 싫었었다. 그렇다고 불쌍한 아내와 자식을 놔두고 차마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이들은 부도나 사기를 맞아 남은 재산은 커녕 빚더미에 월세로 쫒겨나서 살아보고자 바득바득 기를 쓰는데, 나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형편이 아닌가? 후배 식당에서의 일과 대리운전 투잡 일을 병행하던 중 나에게 첫번째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본인의 스토리는 현재 진행 중이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읽으시는 독자들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고 개인적으로 질문이 있으신 분은 카카오톡 ID: jaehan16으로 연락 주시면 시간이 나는데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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