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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중현 Jan 16. 2021

네거티브 넷플릭스

넷플릭스의 소속 신호는 솔직함 우리의 소속 신호는 침묵 

"내가 데리고 있는(던) 직원입니다."

직장 생활하면서 제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정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해 보면 대략 직장 생활의 절반은 한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의 90%는 수사와 조사 업무만 했으니깐 대부분 1년 주기로 과장과 서장이 교체되니 15명이 넘는 지휘관으로부터 사건 결제와 지휘를 받은 걸로 계산됩니다. 

수사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는 사건 처리입니다. 입건되어 송치되는 사건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진행 순서를 큰 타이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고 송치후부터는 검찰에서 기소와 불기소 처분이 이루어집니다.(2021년 1월부터 불기소 처리되는 사건은 이제 경찰에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1.(진정, 고소, 고발, 인지) > 2.(피의자 입건) > 3.(피의자 검거, 체포) > 4.(사건 송치)

1단계는 수사가 시작되는 시점이고 2단계는 1단계에서 접수된 단서들을 바탕으로 범죄가 인정되는 피의자를 입건하면서 사건 번호가 부여되는 본격적인 수사의 개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단계는 입건된 피의자가 자진 출석을 하거나 담당 수사관에게 체포된 후 구속이냐 불구속이냐라는 신병 처리가 결정되면 4단계인 사건 송치와 함께 1차 마무리됩니다.

각 단계에서 담당 수사관이 기록하고 작성하는 수사 보고서는 사건의 틀을 만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서류인데  팀장과 지휘관이 결제가 반드시 들어갑니다. 그러니깐 팀장과 지휘관의 결제가 없으면 다음 수사 활동으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수사보고서 결제는 지휘관이 사건 담당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칼이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제 라인이라는 게 사건 담당자 > 팀장 > 과장(지휘관)의 단계로 올라가다 보니 수직적 방향의 성격을 포함합니다. 한 번은 서무 기획부서에 근무할 때 고심해서 만든 기획 문서 결제를 올렸다가 지휘관으로부터 까인 적이 있습니다. 지휘관의 결제가 끝나면 다른 기능의 협조를 받아야 했던 상황인데 반려를 당했습니다.

"내가 협조를 받아야 하는 부서의 지휘관보다 높은 직급이야? 낮은 직급이야?"

반려 이유를 도저히 알아듣지 못해 서무 경력이 많은 동료에게 자문을 구하러 갔습니다.

"협조를 받아야 하는 부서 결제 라인이 직렬 협조인지 병렬 협조인지를 구분해서 다시 결제를 올리라는 말 같은데..."

그때서야  공문 하나 만드는데 기안 부서와 협조 부서 간 직렬 협조와 병렬 협조가 있는 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이 사건 뒤로 직렬 협조와 병렬 협조를 구분해야 하는 기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는 이걸 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산 집행을 위해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결제 구조라고 이해라도 할 수 있을 건데 마지막 결제권자인 지휘관이 협조를 받아야 하는 부서의 지휘관보다 직급이 낮게 기안이 되어 있으니 반려를 한 듯 싶었습니다. 반려에 대한 이유를 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타 기능에 대한 협조를 받고자 하면 직급의 높고 낮음을 따져야 하는 문화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기획 부서 또한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관계에서 처음 결제를 올리는 사건 담당자나 기획문서 작성자는 가장 밑바닥에 있다 보니 '내가 데리고 있는(던) 직원'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밑에서 일한 적이 없었고 다만 올라오는 결제를 직렬 협조인지 병렬 협조인지 계급의 높고 낮음을 포함해 해석하는 그들만의 결제 라인만 있을 뿐입니다. 특히나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지휘관은 사건 처리에 불만을 가진 민원인들이 청문 감사실로 뛰어가거나 조사실에 드러누워 고함을 지를 때 아니면 사건 담당자가 민원을 받을 때면 사안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나타납니다.

"수사를 잘하는 형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야!"

민원인들 또한 직렬 협조나 병렬 협조를 받아야 하는 사건 담당자와 같은 위치에 처하게 됩니다.

1 페이지에 목숨을 거는 보고서, 화려한 기대효과를 강조하는 보고서, 세상 모든 일을 다하는 것처럼 드러내야 하는 보고서 생산을 강조하는 기획 내근 부서에 근무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기술로 보고서를 만들어 내는 동료를 보면 놀랍기도 하면서 '행달(행정의 달인)'로 통하는 사람들에 대해 극도로 혐오감이 생겼습니다.


'통제와 규정은, 무능력한 직원에게나 필요한 것!'

지구 상 가장 빠르고 유연한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넷플릭스를 재 조명한 책의 타이틀에 끌려 며칠 만에 완독 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왜 미국 시장을 넘어 전 세계 콘텐츠 시장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유연하고 빠른 기업인지 궁금했던 내용들을 알게는 되었지만 괴리감도 함께 커졌습니다.

'넷플릭스의 기업 문화를 도대체 우리나라 어느 기업이 벤치마킹할 수 있다는 말인가?'

특히 인상 깊었던 넷플릭스의 기업문화는 4A 피드백 지침이었습니다.

피드백을 줄 때.

1.Aim To Assist(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하라):피드백은 선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2.Actionable(실질적인 조치를 포함하라):피드백은 받는 사람의 행동이 변화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피드백을 받을 때.

3.Appreciate(감사하라):열린 마음으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4.Accept or Discard(받아들이거나 거부하라):피드백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규칙을 두지 않는 게 규칙이라는 넷플릭스의 기업 운영방침의 바탕에는 직렬 협조를 모토로 한 것인지 병렬 협조를 모토로 한 것인지 체계를 해석해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적어도 책을 통해 느낀 바는 넷플릭스에서 상위 직급은 연봉을 많이 받으면서, 소속 팀원들이 개별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맥락(context)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에 밝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협조를 받아야 하는 부서 간 리더도 협조 요청이 들어온 부서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맥락(context)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에 밝은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넷플릭스는 제가 속해 있는 지휘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정보에 밝은 주장(Informed Captain)'으로 표현하고 있고 이 책에서는 나무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결정에 실패를 경험했을 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드러내야 하고 실패한 당사자에게는 반드시 '소속 신호'로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사건 처리에 대한 책임은 담당자가 가져가고 인사권은 지휘관이 가지고 있는 구조에서 소속 신호는 침묵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각자 보유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책임은 담당자가 져야 하기 때문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피드백은 실무자들끼리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원했던 건 담당자들의 업적을 포장해 화려한 결과로 가져가는 그런 지휘관 말고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소속 신호'를 원했었습니다. 그런 신호를 받지 못하면 결국 같은 팀이라고 해도 내 사건이 아니면 지독하게 무관심해지고 오로지 초점은 지휘관의 눈치를 보는 팀장에 맞추거나 지휘관의 요구에만 맞춰 일하게 됩니다. 물론 실무자들도 지휘관을 평가하는 다면 평가제도가 있지만 인사권 앞에서 과연 객관적인 평가를 한 적이 있는지 나조차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고립되기를 택했습니다. 힘들어도 버텨내면 순서가 돌아오는 '존버'를 택하면 보상은 돌아오겠지만 나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게 많다 보니 직급과 계급면에서 뒤 처질수밖에 없지만 당시의 선택에 더 이상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는 대학교 어떤 학과를 가더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능 시험 성적표를 받고 대학교 진로를 정해야 하는 담임 선생님의 저 한마디에 원하지도 않는 학과를 선택했고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지 못한 가장 후회되는 선택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직원들이 무관심한 부서, 지휘관의 인사권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부서, 매번 인사 때마다 지원자가 전혀 없는 부서의 조건은 고립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때 눈에 들어온 부서가 바로 사이버팀입니다.

보고서 결제 라인은 어딜 가든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데리고 있는(던) 직원입니다."라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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