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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Apr 04. 2020

아버지 서정

거대한 산 같았다. 자전거 뒷좌석에 앉아 올려다본 아버지의 등은. 여덟 살의 나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중학교에 진학하고부터 키가 자라기 시작했다. 친구들끼리 키를 비교하며 유치한 자존심 싸움을 하기도 하던 어느 날, 문득 서 있는 아버지와 나의 눈 높이가 비슷한 걸 깨달았다. 이제 어른이 된 듯한 기쁨 한 켠에 불현듯 슬펐다. 도대체 왜 슬픈 건지 이유를 몰라 혼란스러웠던 그날의 심정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가난한 부모로부터 아무런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 스물여섯에 결혼했고, 그 해에 내가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농삿일을 하셔야 했던 아버지는 나와 나의 동생을 키우기 위해 온갖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내가 국민학생이던 때, 여름이면 아버지는 작은 트럭에 소금과 부식거리, 과일 등을 싣고 시골을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하셨다. 여름방학이 되면 나는 어머니의 반 권유 반 강제에 억지로 아버지의 장삿길에 동행해야 했다. 철없던 나는 그것이 그렇게 싫었다. 여름방학은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겠는가? 그런 황금같은 시간에, 오전부터 밤까지 아버지를 따라 트럭을 타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돌아다니는 게 어찌나 싫었던지. 아마도 어머니는 고생하시는 당신의 남편이 큰아들을 보며 힘을 내기를 바랐으리라. 속없던 나에게도 가족을 위해서 힘들게 일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간혹 떼를 쓰는 나에게 화가 난 아버지가 집에 있으라고 해서 목적을 달성했던 적도 있었지만, 튀어나온 입술로 조수석에 어쩔 수 없이 앉은 날도 많았다. 당시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은 나는, 그 때 왜 좀 더 흔쾌히 아버지를 따라나서지 않았던가 뒤늦게 후회가 된다.


그 시절 일요일 새벽이면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가 때를 밀어주는 그 시간이 나는 두려웠다. 온몸이 따갑고 쓰릴 정도로 세게 때를 미는 아버지 때문에 칭얼댔던 기억이 떠오르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중, 고등학생 때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간 적이 없었다. 머리가 굵은 나는 아버지와 발가벗고 탕에 들어가는 것이 어색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사우나나 목욕을 즐기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난 후 아버지가 한 번씩 목욕탕에 가자는 말씀을 하실 때도 그냥 혼자 다녀오시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었다.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일지 나는 전혀 몰랐었다. 아버지의 그런 사소한 즐거움도 들어주지 않았던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지난 명절 때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다. 내 등을 밀어주는 아버지의 손길에는, 어린 시절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강하고 억센 힘이 없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꾼다. 아버지의 젊음을 앗아간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세월 덕에 어릴 적에는 미처 몰랐던 것을 깨달은 게 아닌가. 다만 깨달은 것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슬플 따름이다.


아버지는 많이 배우신 분도 아니고 돈이 많으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 누구보다 존경스럽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지만 존경할 수는 없는 어른들이 세상에 너무도 많다. 나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나는 자랑스럽다. 치매에 걸려 몇 년을 고생하신 당신의 장모를 마지막까지 친어머니처럼 돌보신 분, 처자식을 위해 평생을 성실함으로 희생하신 분, 부족하기만 한 큰아들의 실수를 다 감싸 안아주신 그분은 존경받아 마땅한 진정한 '아버지'이시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는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통해 만나는 모든 인연 중에서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와의 만남일 것이다.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내 삶을 시작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그분에게 그런 기쁨과 행운을 드리지 못한 것이 그저 죄송하다. 언젠가는 회한의 눈물을 흘릴 날이 오겠지만, 미래의 그날 조금이라도 덜 울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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