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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Nov 03. 2020

마지막 SLR로 찍은 찬란한 저녁노을

나의 카메라 편력기 2 - 니콘 F6

기어이 감기로 사나흘 동안 앓아누웠다. 그날의 해풍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몸의 이상을 느꼈는데 역시나 근래 앓아본 적 없을 정도의 독한 감기로 고생했다. 이불을 이마까지 뒤집어쓰고 끙끙 앓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바닷바람과 싸우면서 찍어 온 사진들이 잘 찍혔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현상된 포지티브 필름을 라이트 박스 위에 놓고 루페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두 방의 주사와 닷새 분의 약, 잠자리에서 비오듯 흘린 땀 덕분에 며칠 뒤 개운한 몸으로 현상소로 향했다. 필름으로 사진 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결과물을 확인할 때의 설렘을. 결재를 하고 현상된 포지티브 필름을 형광등에 비춰 대충 훑어보니 찬탄이 절로 나왔다. 얼른 라이트 박스에 전원을 넣고 루페로 필름을 보는 순간, 밤하늘의 황홀한 색감에 잠시 말을 잊었다.


해변의 낙조 / 니콘 F6 / AF 20mm 1:2.8D / 코닥 E100VS





 

니콘 F6 ( 사진 출처 : 니콘이미징코리아 )



F부터 이어지는 니콘의 플래그십 필름카메라는 F6에서 명맥이 끊겼다. 아직 니콘이라는 카메라 회사가 꾸준히 디지털 카메라를 생산하고 있으니 앞으로 혹시 F6의 후속기를 만들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디지털 카메라의 시장 추세나 높아지는 필름의 가격과 그로 인해 점점 희소해지는 필름 이용자 등을 생각하면 아마 필름 SLR카메라는 F6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신제품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다른 카메라 회사들이 온통 DSLR 생산에 열을 올리던 2004년, 니콘의 개발진들은 8년 주기로 니콘의 필름 플래그십을 개발한다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필름 SLR인 F6를 내놓았다. 그 우직함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들을 높게 평가한다.

니콘 F6는 궁극의 필름 SLR이다. 전통적으로 니콘의 F 시리즈는 높은 신뢰성과 완성도로 많은 사진가들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위험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진기자들에게 F 시리즈의 카메라들은 둘도 없는 친구같은 존재였다. 요즘같은 디지털 시대에 필름 SLR을 들고 취재를 나가는 사진기자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F6는 묵직하고 차돌같은 F 시리즈의 단단함과 신뢰성을 계승하고 있다. 필름 카메라에 구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능을 담아 사진가의 작업에 효율성을 높여준다.



비 오던 오후 / 니콘 F6 / Planar 1.4/50 ZF T* / 코닥 400TX ( 2스탑 증감 )






해는 생각보다 빨리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하늘에는 붉은 빛살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해풍은 매서웠지만 저런 장관을 또 언제 보랴 싶었다. 한 컷을 더 찍기 위해 파인더를 들여다보며 노출계를 확인했다. 조리개를 11에 놓았더니 5초의 노출 시간이 필요하다고 F6가 나에게 알려줬다. 애초에 카메라를 삼각대에 장착하고 리모컨까지 달아 놓았으니 5초의 시간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만 필름카메라는 촬영 후 확인이 불가하지 않은가. 만약 카메라가 보여주는 노출값이 과다 노출이나 과소 노출이라면 애꿎은 필름만 낭비하는 것이고 기대는 허탈함으로 바뀌게 된다.

흔히 디지털 이미징 센서보다 필름의 노출 관용도가 더 넓다고들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컬러든 흑백이든 네거티브 필름의 노출 관용도는 매우 넓다. 따라서 노출값이 약간 안 맞았더라도 적당히 보기 좋은 사진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포지티브 필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노출이 안 맞은 사진을 살리기가 아주 어렵다.

그날 F6에 물려있던 필름은 코닥의 E100VS. 채도가 높기로 유명한 포지티브 필름이었다. 나는 평소 풍경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기에 1초 이상의 장노출로 촬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려 5초라니... 과연 이게 적정한 노출값일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잠깐 머뭇거린 나는 별도의 노출보정 없이 F6의 노출 측정값대로 리모컨의 셔터를 눌렀다. F6의 노출계는 내 실수가 아니라면 단 한 번도 잘못된 노출로 사진을 망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F6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한 폭의 그림같은 사진을 내 방 한 쪽에 걸 수 있게 해 주었다.



니콘 F6 / AF 20mm 1:2.8D / 코닥 E100VS






2020년 10월, 니콘이 F6를 단종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요즘같은 세상에 필름카메라, 그것도 크고 무거운 SLR을 누가 얼마나 쓰겠는가. 선대가 후대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지는 것이 비단 카메라만은 아니다. 다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니콘 F 시리즈의 마지막 카메라마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하니 마치 초라한 노년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아쉽기만 하다.

빛나던 태양은 어둠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질 때 최후의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하늘을 황홀하게 물들인다. 필름 SLR카메라 기술의 모든 것이 응축된 F6, 최후의 황홀한 노을과도 같은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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