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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Dec 07. 2020

사진은 마음으로 찍는다

나의 카메라 편력기 3. 롤라이플렉스 MX-EVS

'아, 이제 나도 정말 늙었구나.'

어느 날 문득 손목을 보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손목에 바짝 조여 찼던 시계를 풀어놓은 지 두어 시간이 지났는데 스트랩 자국이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다.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거야 세상의 이치이지만 그 만고불변의 진리가 나에게 적용되는 것은 왜 이다지도 생경할까? 손목의 시계 자국이나 얼굴의 베개 자국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것도 내가 늙어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롤라이플렉스 2.8F ( 사진 출처 : www.rolleiflex.hu )



롤라이플렉스는 120 필름을 사용하는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TLR)이다. 클래식한 외관과 작고 가벼운 셔터음, 넓고 아름다운 파인더 등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진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모델들이 출시됐고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2.8 F나 3.5 F 화이트페이스의 경우에는 지금도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게다가 흔히들 많이 보는 직사각형 모양의 사진이 아니라 정방형 포맷의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중형 필름 카메라 중에 야시카나 펜탁스 같은 일본 카메라 회사에서도 정방형 포맷의 카메라를 출시한 적이 있으나 롤라이플렉스와 핫셀블라드 등의 유럽산 카메라가 대표적인 정방형 포맷 카메라이다. 핫셀블라드는 렌즈 교환이 가능한 일안 반사식 카메라라서 미러 쇼크가 상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스튜디오 촬영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그에 비해 롤라이플렉스는 렌즈 교환은 불가능하지만 셔터를 누를 때 충격이 거의 없어서 저속 셔터에서도 흔들림이 거의 없다. 그런 특징 때문에 야외 스냅샷에 유리하다. 

롤라이플렉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카메라들이 촬영자의 눈높이(아이 레벨)에서 촬영하는 것과 다르게 이 카메라는 카메라의 촬영자의 가슴 높이(웨이스트 레벨)에서 촬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롤라이플렉스로 촬영하는 행위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촬영자의 마음에 들어오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롤라이플렉스로 셀프 포트레이트를 촬영하는 비비안 마이어






롤라이플렉스 MX-EVS ( 사진 출처 : https://images.app.goo.gl/fV6JxrQCsgzQ6C9A7 )



오토맷이라고도 불리는 MX-EVS는 1930년대부터 생산된 초기형 롤라이플렉스이다. 75mm의 표준화각과 3.5의 최대 개방 조리개값의 테사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이다. 아주 오래된 카메라이기에 성능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으나 막상 사용해 보면 렌즈의 퍼포먼스에 깜짝 놀라게 된다. 특히 흑백 필름과의 궁합이 대단히 좋다. 컬러 필름을 사용하면 약간 물이 빠진 듯한 색감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마저도 분위기 있게 찍히기 때문에 개인의 선호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우리 집을 처음 갖게 된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전까지는 2년마다 이사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거쳐간 집들은 대부분 좁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골목을 보거나 떠올리면 언제나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고 김기찬 사진가의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집을 가장 좋아하는 것도 그의 사진 속에 찍힌 골목과 사람들이 바로 나의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 김기찬 사진가(1938~2005)



시간이 흐를수록 정겨운 골목들은 점점 사라지고 높이 솟은 아파트와 빌딩들로 도시의 풍경이 바뀌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추억이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사람에게는 서글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제 나의 어린 시절 추억 속의 골목은 도시 변두리의 드라마 세트장에 가서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몇 년 전 순천 드라마세트장에서 롤라이플렉스로 찍은 사진을 찾아보며 이 카메라가 오래된 골목과 많은 것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편리함과 실용성에 밀려 사라지는 것이 말이다. 



순천 드라마 세트장 / 롤라이플렉스 MX-EVS / 코닥 400TX



어린 시절 골목에 대한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추억으로 남았듯이 디지털 시대에 롤라이플렉스 카메라와 그 카메라로 찍은 기억도 장식장 속에서 박제된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도도히 흐르는 강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으러 나가려면 가지고 나갈 필름을 골랐던 나도 지금은 조그마한 디지털 P&S 카메라 한 대만 들고 나간다. 그렇지만 이번 주말에는 간만에 롤라이플렉스의 먼지를 털고 중형 흑백필름 한 롤을 물려 그나마 몇 군데 남지 않은 골목을 돌아봐야겠다. 사라져가는 것을 아쉬워만 하고 있기보다 아직 남아있는 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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