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by 공간여행자

후계동을 아시나요?

서울 끝자락에 있는,

평지보다 오르막이 더 많은 동네.


첫인상은 조금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물도, 사람도 낡고 오래된 것뿐입니다.


멋지고 잘난 드라마 주인공은 보이지 않고,

아저씨들만이 모여 있습니다.


손대는 사업들은 망하고, 사채업자에게 시달리고, 아내와는 별거 중인 첫째 상훈 아저씨와

천재 영화감독 소리를 듣던 셋째 기훈 아저씨는 최근 형제 청소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들 한때,

은행 부행장였지만 지금은 모텔 수건을 대고 있는 권식 아저씨,

자동차 연구소 소장였지만 미꾸라지를 수입하고 있는 진범 아저씨,

제약회사 이사였지만 부부 청소방을 하다 상훈, 기훈 형제에게 넘겨주고 지금은 백수인 제철 아저씨


그리고 현재 유일한 직장인인 대기업 다니는 동훈 아저씨가 있습니다.


이들은 주말 아침에는 축구를 하고

저녁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정희네'로 모입니다.


'정희네'라는 한글로 또박또박 쓰인 나무간판 아래

유리가 끼워진 나무문의 동그란 손잡이를 당겨 열고 들어서면

안쪽 오픈 키친에서 언니가 얼굴을 내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왔어?'하고 반겨줍니다.


손님보다 더 많이 마시고, 더 빨리 취하는 정희 언니

지금도 꽃같이 아름다운 언니가 왜 아직 혼자인 건지,

말만 무성한 언니의 첫사랑과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만, 아무도 언니에게 묻지 않습니다.


최근 '정희네'에 뉴페이스 두 명이 찾아왔습니다.


한 명은 천사 같은 얼굴로 폭탄 같은 말만 내뱉는 여배우 유라

다른 한 명은 이제 갓 스물 초반인 얼굴로 400살 같이 구는 지안 씨

(드라마에서 지안은 본인을 3만 살이라고 하지만, 내 느낌은 400살 같음.)


오늘도 시끌벅적한 정희네에서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망가진 몸과 마음을 감추려 애쓰지 않고

망가진 사람들 속에서 아무 일 없는 듯

술을 홀짝입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고

망가졌지만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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